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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민감자

HSP ; Highly Sensitive Person

by 하유미



“이거 한 번 해봐.”

“이게 뭔데?”

“HSP 체크리스트야.”


남편에게 영상을 보여주고 양치를 하고 왔다. 매사 심드렁한 아이조차 ‘요새 집안 분위기 왜 이래?’라고 물어볼 정도로 공기가 예사롭지 않은 걸 눈치챈 탓인지 남편은 순순히 응했다.


“몇 개나 해당돼?”

“16개”

“나는 어떨 것 같아?”

“전부...... 다?”

“틀렸어. 22개야. 배고프면 기분이 나빠지는 건 제외야.”

“그럼 당신이 이런 유형의 사람이라는 거네.”

“당신이 냉장고 속에 식재료가 뭐 있나 살펴보는 것보다 나를 등한시하길래.”

“알겠어.”


남편은 알겠다면서 ‘근데, 어, 결과로 보면 나도 예민하네.’라는 사족을 달아 기어코 눈총을 받았다.


경로를 이탈한 차량의 내비게이션처럼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날들이다. 부모, 자식, 며느리, 친구 어떤 역할에도 녹아들지 못하고 초보배우처럼 로봇연기를 이어가고 있다.

어딘가에 있기를 제발, 손에 잡히지 않는 피안의 평안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HSP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호기심으로 해보았는데 한 가지 항목을 제외하고 모두 내게 해당사항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전문 의학용어는 아니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초민감자였다.


초민감자, 감각처리에 있어 민감성을 보이는 부류로 고사양 센서를 장착했기 때문에 인생의 난이도가 높다는 설명을 듣다가 어이없게도 뭉클해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증에 시달리다 명확한 진단을 내려주는 명의를 만난 기분이랄까. 환자에게 그저 병명을 아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민감한 기질이 뚜렷했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기분이 들어 지레 겁에 질릴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남들에게 별 일 아닌 일이 내게 별 일이 되는 억울한 사정이 흔하게 있었다. 자연스레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덤벼드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면 도망가 숨을 곳을 살면서 곳곳에 팠다. 그렇지만 삶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어서 숨었던 자리마다 굴곡이 졌다. 지금도 어디 몇 군데는 새고 있을 테고 이제는 여기저기 구멍이 난 삶의 모양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됐을 뿐이다.


짧은 영상 하나에 그간 숱하게 받은 비난의 화살들이 후드득 뽑혀나가는 마음이었다. 되돌아보니 늘 좀 외로웠던 지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안쓰럽고 대견해진다.

나, 벌써 반백년이나 살았네.



<체크리스트>

1. 밝은 불빛, 강한 소리, 냄새 등에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

2. 예술에 깊이 감동하고,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3. 주변 환경이 어수선하거나 혼잡하면 집중하기 어렵다

4. 배고프면 기분이 나빠지고, 일상에 지장이 생길 정도다

5. 사소한 변화나 미묘한 디테일을 잘 알아차린다

6.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고, 영향을 받는다

7. 시끄러운 모임, 파티에서 금방 지치거나 기운이 떨어진다

8. 해야 할 일이 몰리면 압도감을 느낀다

9.‘너무 예민하다’, ‘생각이 많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10.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장면을 보면 쉽게 불편해지고 오래도록 힘들다

11. 일정이 빡빡하면 긴장, 스트레스가 크게 쌓여 휴식이 필수적이다

12. 카페인에 민감하다(두근거림, 불안)

13. 강렬한 조명 아래서는 쉽사리 피로해진다

14. 향수나 음식 냄새 등 강한 냄새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15. 감정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 여파가 길게 이어진다

16. 갑작스러운 변화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크게 불안해진다

17. 격렬한 활동보다 차분한 활동을 선호한다

18. 무언가를 배울 때 시간을 갖고 깊이 파고들어 익힌다

19. 다른 사람보다 사소한 디테일까지 캐치한다고 느낀다

20. 상대방의 말투, 표정, 억양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21.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쉽게 놀란다

22. 새로운 환경에 가기 전, 미리 정보를 찾고 대비하려 한다

23.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늘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등을 깊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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