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들부들 과 꾸역꾸역

by 하유미



얼마 전 10년간 장롱면허 신세를 청산하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게 이럴 때 자의 반 타의 반이란 말을 쓰던데 나는 그 말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난데없이 등 떠밀려 시작하게 됐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기분이랄까. 이유야 어찌 됐든 이왕 시작한 거 지금 아니면 죽을 때까지 운전 못 할 거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예전에 육아를 경험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어찌나 심하던지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이 죄다 파괴되는 기분이었는데 그만한 미궁이 내 인생에 또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적어도 나에게 운전은 그랬다.

초반에는 그래도 희망차게 ‘매일 부들부들 떨면서 운전대를 잡고 꾸역꾸역 연습을 해야겠다.’고 포부도 가졌었다.

지난 주말 ‘부들부들 과 꾸역꾸역’의 의미가 그동안 얼마나 다르게 각색이 되었는지 크게 깨달았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남편을 운전 선생님으로 둔 건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운전하면 성격이 나오는 것인지.(정말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다.)

어쩜 나는 운전할 때조차도 어리바리하고 상황 판단이 느린 것인지!

호기롭게 남편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처음 타본 날, 옆 차선에서 나란히 달리는 트럭이 무서워 피한답시고 중앙 분리대 쪽으로 시속 100km로 돌진해 남편을 식겁시켰다.

또 한 번은 신천 대로에서 3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하면서 1차선에서 넘어오는 차를 전혀 살펴보지 않아 남편뿐만 아니라 그 차도 함께 식겁시킨 적도 있다.

(룸미러 볼 줄 모른다는 말로 친정 아빠를 기암 시킨 건 얘깃거리에도 못 든다.)

그때마다 남편은 지옥 문턱을 경험한 탓인지 이성을 잃었는데 그 성질을 다 받아 주기엔 나도 나대로 뿔이 나서 차에서 내릴 때까지 좁은 차 안은 매번 전운으로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러다 지난 주말 우리 차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주말 오후 마트에 가려고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사이드미러가 주차 기둥에 끼어 버렸다. 후진해서 빼낸다는 게 전진 기어 그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더 꽉 끼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뭐 부서진 것도 아니고 해서 몇 번 앞뒤로 움직여 잘 빠져나왔는데 차 앞에서 이 과정을 다 지켜보다 조수석에 올라탄 남편은 이미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남편의 사정을 애써 외면하며 마트로 향하던 중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1차선에 줄을 서려다 또 중앙 분리대 쪽으로 돌진을 했나 보다. (남편 말이 그렇다. 나는 똑바로 갔다.)

갑자기 남편이 "박겠다!"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

'확 들이받아 버릴까. 그냥 차가 박살 나는 꼴 좀 보게.’ 하는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부터 화라는 것이 어떻게 나를 장악해 갔는지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나열해본다.

얼굴 근육이 굳는다. (그래서 말하기가 싫구나.)

위가 굳는다. (그래서 소화불량이 오는구나.)

어깨가 굳는다. 승모근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아! 그래서 성난 뒷모습이라고 하는구나.)

걸음이 빨라진다.(주차장에 남편을 버리고 거의 뛰다시피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호흡이 가빠지니까 잘 안 들리고 (그래서 소리를 지르는구나.) 잘 안 보인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남편은 카트만 보고 나는 앞만 보고 어찌나 초스피드로 장을 봤던지 무인정산기에 주차 정산할 게 없다고 뜬다.

엄마 아빠가 너무 빨리 돌아와 아이가 당황할 지경이었다.

장거리를 주방에 내팽개쳐놓고 곧장 침대에 가서 드러누웠다.



사람마다 화를 푸는 방법이 다 다를 것이다. 나는 심각한 정도만 아니면 대게 자고 일어나면 풀린다.

누워서 가만히 혜민스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내 안에 화가 일어나면 마음 밖으로 나와서 그것을 쳐다보라. 화는 우리 마음에 잠시 들어온 손님이다. 이 손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소멸한다.'

‘그래, 불청객아 잘 나가거라.’ 속으로 외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주문이 들었는지 어쩐 건지 화가 많이 풀렸다.

아직 미적대고 남아 있는 손님은 오늘 밤에 마저 보내드리마 생각하며 저녁을 해 먹었다. 미안했던지 남편은 "사고 날까 봐 그랬어..." 중얼거리며 저녁밥을 돕는다고 얼쩡거린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뭐보고 놀란다고 그동안 여러 번 남편을 식겁시킨 (내 생각엔 호들갑에 가깝지만) 내 탓도 있으려니 싶어서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날 저녁에 뭐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밥이 맛있었을 리 없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단식농성 며칠 짜리 사건인데 말이다. ‘화’에게 지지 않고 잘 대접해서 내보낸 스스로가 기특했다.



또 모를 일이다. 얼마 뒤 ‘부들부들 과 꾸역꾸역’이 또 다른 의미로 각색이 될지는. 그때는 부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이길 바라본다.



[추신 : 이야기에는 과장이 있습니다. 성질 급한 거 빼고는 좋은 남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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