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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May 27. 2020

일리아스(제10권)

돌론의 정탐


 
“아가멤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스토르를 찾아가 달아날 것인지 아니면 싸울 것인지 의논한다. 둘은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를 비롯한 몇 명의 지휘자들을 파수병들이 있는 곳으로 모아 회의를 하고 트로이아 진영으로 정탐꾼을 보내기로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가 임무를 맡고 떠난다.
그러나 그 시각 헥토르도 계책을 세운다. 돌론이 자원해서  정탐꾼으로  나서지만 아카이오이족 진영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들판에서 오뒷세우스와 디오메데스에게 잡힌다. 몸값을 바칠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돌론. 오뒷세우스는 돌론에게서 정보를 빼낸다.
‘헥토르는 모든 참모들과 전쟁의 소음에서 떨어진 곳에서 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따로 선발된 파수병은 없습니다. 동맹군들의 현재 위치는 이러이러합니다. 트로이아인들을 공격할 작정이라면 다른 자들과 떨어져 맨 가 쪽에 있는 트라케인들을 치십시오. 그들의 왕 레소스의 말과 전차는 제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포로가 되기를 원했던 돌론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디오메데스의 칼날이 그의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는 곧바로 트라케인들 진영에 침입해 잠들어 있는 트라케인 12명을 도륙하고 마침내 레소스 왕도 죽이고 무구들을 전차에 싣고 말을 몰아 도망쳤다.
그들 뒤로 몰려드는 트로이아인들의 고함소리와 형언할 수 없는 소란이 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진영으로 돌아온 둘은 돌론의 피 묻은 전리품들을 챙기고 몸을 씻고 아테나에게 제물을 바쳤다.“
 
<독후감>
아, 돌론! 돌론! 그의 멍청한 몸놀림과 새털보다 가벼운 입놀림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상으로 받을 재물에 눈이 어두워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정탐을 나서다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자리도 자리 나름이지, 어렵고 위험한 일수록 자격이 있는지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깜’이 안 되는 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지위를 맡았을 때 닥치는 고난은 오롯이 백성들 몫이 된다는 걸 돌론이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motormouth만으로는 성에 알찼 한참을 떠벌떠벌 거리다 갑자기 “그런데 왜 그런 것을 꼬치꼬치 캐물으십니까?”라고 묻는 백치미까지 뽐내고 나서야 죽었다.
그의 마지막은 이렇게 묘사됐다. ‘아직도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그의 머리가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10권까지 읽으며 누군가의 죽음이 꼬숩기는 처음이었다. 어휴, 돌론.
 
내가 돌론을 미워할 정도로 안타까웠던 이유는 이 전쟁의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승부에서든지 나도 모르게 지고 있는 쪽을 더 응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시즌 들어서 해외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와 이강인 선수의 경기 중계를 새벽마다 보면서 지는 팀을 응원하는데 신물이 났다. 그래서 지난 주말 울산과 부산의 축구경기를 보면서 어느 팀이든 이기는 팀을 응원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같이 중계를 보던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는 어느 팀을 응원하는 거야? 벌써 다섯 번째 오락가락하고 있는 거 알아?”
생각해보니 울산이 밀리면 울산을, 부산이 밀리면 부산을 응원했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패자를 응원하는 버릇 때문이다.(그렇지만 토트넘과 발렌시아는 제발 좀 이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돌론이 그렇게까지 원망스러웠나 보다.
이 전쟁은 결국 트로이아의 멸망으로 끝이 나니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디오메데스와 오뒷세우스가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바닷물에 피와 땀을 씻어내고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올리브유를 몸에 바른 뒤 식사할 준비를 하고 포도주를 마신다.
고대 병영 생활이 내 생각보다 훨씬 윤택했었나 보다.
대충 샤워만 하고 보습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푸석거리는 내 피부를 쳐다봤다.
나도 오늘은 요리에 쓰고 남은 올리브유를 바르고 개봉한 지 너무 오래돼 식초에 가까운 굴러다니는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며 고대 병영 생활보다 낭만이 없는 내 일상에 윤활유를 부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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