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뱃속에서 처음으로 전해 온 소리는 심장소리였다. 나는 초음파로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가끔씩 콩콩거리는 진동으로 느껴지는 딸꾹질도 여간 신통방통한 게 아니었다.
아이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고 나는 무엇보다도 아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내 기대와 달리 울음 외에 도통 어떤 소리를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언제 사람다운 소리를 좀 내보나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안 아이라고 마냥 먹고 자고만 한건 아니었나 보다.
때가 되자 침을 마구 튀기며 ‘부르르르’하는 소리를 내어 아이도 말 시동을 걸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아이가 튀기는 침을 맞으며 말문이 터지는 기대에 부풀었다.
얘기하다 보니 아이의 재미난 버릇이 생각난다.
그맘때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잠투정을 해서 재우려면 꼭 업어야 했다. 무슨 이상한 태고의 유전자가 내 안에서 발동되는 것인지. 아이를 업고 재울 때면 상 음치 주제에 자장가랍시고 목닥같은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는 업혀서 잠이 들 때까지 내 자장가에 뒤질세라 '아아’ 소리 내기 시작했다. 잠이 올수록 의문의 소리도 커졌는데 장차 명창이 되려나 싶게 한 곡조 시원하게 뽑고 나서야 고개를 파묻었다.
엄마의 자장가 따위를 계속 듣느니 아이는 일찍 감치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의 말소리에 유독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아이의 외마디 말만 듣고도 무슨 뜻인지 잘 알아챘다. (이런 관심과 추리력을 공부에 쏟았더라면!)
기억하기로 아, 마(입을 닫았다 열면 엄마로 들린다.), 다음으로 ‘바’ 소리를 냈는데 아이는 많은 것을 ‘바’라고 지칭해서 헷갈리게 했다. 어떨 땐 바나나였다가 어떨 땐 그게 아빠도 되었다. 그때마다 찰떡같이 구분해내는 나에게 남편은 존경의 눈빛을 보내곤 했다.
아이가 좀 크고 글자를 알게 되어 재미났던 일도 많았다.
기억나는 것 중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폭탄을 판대. 저기 세일 중이래! “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좌회전을 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폭탄의 정체에 남편과 나는 폭탄 맞은 듯이 웃었다. 사거리 모퉁이 타이어 가게에 ‘폭탄세일’이란 플래카드가 사납게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치원을 다닐 때는 뚱딴지같은 영어로 내 골몰을 썩히기도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츄링 츄링 츄리링. 버글 버글 버글 팟’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녀서 그 노래를 해독하느라 뇌 주름이 다 펴질 뻔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건 ‘츄잉 츄잉 츄잉검 버블 버블 버블 팝’이라고 불러야 되는 노래였다.
눈치채셨겠지만 영어를 외계어처럼 구사하는 아이라 사과를 애플이라고만 해도 남편과 나는 감탄을 했다.
또래 친구들은 사과가 애플인걸 알 뿐 아니라 코끼리가 엘리펀트인 것도 알고 심지어 대게는 영어로 쓸 줄 알 때까지도 우리 부부는 남다른 의미로 아이의 영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 어느 날 아이가 대뜸 ‘프린세스’라는 그 어려운 단어를 안다고 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패드로 게임 삼매경이던 아이가 불쑥 ‘나 프린세스가 뭔지 알아.’라고 말했다.
남편과 나는 도합 네 눈이 휘둥그레져서 ‘정말?’이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패드에서 고개를 들고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응. 알아. 활 쏘는 여자를 말하는 거잖아. 왜?"
하필 아이가 하는 게임속 프린세스들은 다들 활을 잘 쏘고 난리람.
혹시 모르지. 옛날 프린세스들은 문무를 겸비하여 정말 활도 잘 쏘았을지......
아이는 그런 식으로 게임을 통해 애플보다 더 어려운 영어 단어들을 익혔다.
언젠가 여름 태풍 때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은 날.
‘엄마 우리가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같아.’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감동을 주던 아이는 게임과 유튜브의 세계를 영접하며 언어생활이 아주 슬기로워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의 언어능력도 나날이 슬기로워지고 있어 수능을 다시 봐야 하나 하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매일같이 유튜브를 들여다보며 '브금’이라고 외쳤다. 며칠간 연구 끝에 그것이 BGM을 소리 나는 대로 읽은 단어라는 걸 알아냈을 때 기쁨이란 안 풀리던 미적분 문제를 풀었을 때와 견줄만했다.
불혹을 넘기고 매일 내 언어능력의 한계치를 시험하고 있다.
어젯밤, 아이가 잠옷을 갈아입으며 예고도 없이 쪽지시험을 보는 바람에 하마터면 이번에는 뇌 주름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엄마 유유분단이 뭔 줄 알아?”
유유분단? 뭐 복세편살 같은 신조어인가?(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글쎄 잘 모르겠는데. 유튜브 용어야?”
그랬더니 아이가 청산유수같이 말한다.
“결정을 잘 못한다는 사자성어잖아. 어휴. 엄마는 그것도 몰라? 유! 유! 분! 단!"
솔직히 잠시 고민했다. ‘프린세스’는 몇 년이나 우려먹어서 놀림거리로 이제 좀 시들하던 참이었는데 '유유분단’으로 갈아탈까?
악마의 유혹이 어찌나 단지 겨우 내가 명색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정신 차렸다.
애석하게도 바로 알려줄 수밖에. 우! 유! 부! 단!
일단 배꼽 빠지게 실컷 웃고 난 다음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