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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l 15. 2020

일리아스(제20권)

신들의 전투



“제우스가 궁전으로 모든 신들을 불러 모은다. 제우스는 신들에게 각자의 뜻대로 편을 들어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신들은 양 진영으로 나뉘어 달려가 싸움을 격려하고 마침내 자기들끼리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포세이돈 왕에게는 아폴론이,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는 아테나가, 헤라에게는 아르테미스가 맞섰다.
양군이 들판을 가득 채운 한가운데에서 아이네이아스와 아킬레우스가 마주쳤다. 아이네이아스의 강한 창도 신이 만든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포세이돈은 위험에 처한 아이네이아스를 싸움터의 밖으로 내던지고 아이네이아스의 방패에 박힌 창을 뽑아 아킬레우스의 발밑에 갖다 놓는다.
싸움 상대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려 침통해하던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오이족 전사들을 격려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헥토르 또한 트로이아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의 전사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헥토르는 아폴론의 충고를 듣고 도로 전사들의 무리 속으로 물러난다. 아킬레우스가 무시무시하게 함성을 지르며 그를 죽이려고 세 번이나 창을 들고 덤벼들었지만 아폴론은 세 번 다 짙은 안개를 쳐서 헥토르를 구해주었다.
아킬레우스가 창을 들고 신과 같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적들을 뒤쫓아 가 죽이니 피가 검은 대지에 내를 이루었다. “


<독후감>
긴 유럽여행에 조금 지쳤다. 매일 빵과 파스타만 먹는 것에 질려 중국음식으로라도 향수병을 달래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앞서 말했듯이 라떼는 국민학교...) 수업시간에 교과서 뒤에 삼국지를 몰래 숨겨서 읽었던 것처럼 일리아스 위에 삼국지를 펼쳐놓고 읽었다.(이제 몰래 읽을 필요는 없으므로)
입에 붙지도 않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족보를 애써 외우지 않아도 되니 술술 읽혔다.


유, 관, 장 삼 형제를 비롯한 장수들은 누구 하나 싸움에서 빼는 법이 없고 의협심에 불탄다. 적과 마주하여 정작 싸움보다 말싸움에 더 열심인 그리스 장수들과 얼마나 비교가 되던지.
아이네이아스가 마침내 아킬레우스와 맞닥뜨려 서로 창을 겨누기 전에 자기 가문과 혈통을 먼저 가르쳐 주겠다며 읊는 이야기가 세 페이지에 달한다. 긴 이야기를 마친 그는 아킬레우스가 말로 반격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자, 그러니 결전의 싸움터 한복판에 서서 어린아이들처럼 이런 이야기를 길게 주고받지 맙시다!”
입도 벙긋 못해보고 창을 들어야 했던 아킬레우스, 몸보다 입이 더 근질근질했을 것 같은데.


또 명분을 중시하며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는 중국 장수들의 대인배 같은 면모를 보니 그리스 최고의 장수조차도 개인의 이익에 불만을 품어 태업을 하는 모습이 더욱 한심하고 모양 빠져 보였다.
게다가 잘 익은 벼가 어찌나 고개도 잘 숙이는지.
유비는 자신을 낮춤에 발바닥까지 이르고 상대를 높임에 하늘을 찌른다.
만나기만 하면 집안 자랑에 날 새는 줄 모르는 그리스 장수들, 겸손을 좀 배워야겠다.


그런데 어째 삼국지를 읽어 나갈수록 신에 관한 이야기는 한 오라기도 나오지 않는데도 신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일리아스야말로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삼국지보다 일리아스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가 소인배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리아스 속 영웅들은 한없이 인간적이다. 신들조차도.
질투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남 탓을 하고 거리낌 없이 자기 속마음을 표출한다.
그러나 삼국지의 영웅들은 성인의 반열에 올라있다.
인내하고 허물을 감싸주고 강한 책임감을 보이고 말을 아끼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삼국지에도 그러지 못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일리아스 속 주인공들은 절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유비를 만나면 왠지 무릎 꿇고 술잔을 받들고 우러러봐야만 할 것 같은데 아킬레우스와는 어깨동무를 하고 건배를 하며 험담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헥토르 개자식!”이라고 욕지거리도 하면서.


충과 의, 인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중국 소설과 합리적이고 개인의 독립성을 중요시하는 서양 철학이 바탕이 된 그리스 소설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학문적 고민을 살짝 얹어 보았다.
한껏 미화된 절대 영웅의 이야기에 속이 시원할 수도 있겠고, 주말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듯한 나랑 별반 다르지 않은 영웅의 이야기에 공감이 갈 수도 있겠다.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지구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슈퍼맨에 열광할 것인가.
쫄쫄이 팬티를 입고 빈속으로 날아야 속이 편하다는 슈퍼맨 이야기에 열광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모든 영웅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데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한동안 샛길로 새는 바람에 독후감 쓰기에 태만하였음을 고백한다.
완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분발해야겠다.


<독후감 외전(?)>
불혹을 넘긴 여자와 아직 지학에도 이르지 못한 남자 아해의 대화를 들어보자.
여 : 장비는 술만 마시면 망나니가 된다네.
남 : 저런!
여 : 요즘으로 치면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겠는가.
남 : 그 말이 일리가 있소.
여 : 그나저나 관우의 얼굴은 왜 그리 붉은 것이오?
남 : 알고 보면 관우가 장비보다 더한 알코올 중독자 인지도 모르외다.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어 그 버릇은 다 없어지고 얼굴색만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가 보오.
여 : 그 말 또한 일리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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