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by 하유미




요즘 우리 집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종일 릴보이의 곡이 흘러나온다. 쇼미더머니 시즌 9이 끝난 지가 언젠데 하겠지만 뒤늦게 찾아보기 시작한 늦깎이 시청자에겐 최신곡이나 다름없다.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 있었을 당시에 어쩌다 한 번쯤은 노래를 들어봤을 법도 한데 그동안 어떻게 한 번도 못 들었을까 싶어 검색해보니 방영 기간이 작년 이사 시기랑 딱 겹쳤다.
그럴 만도 하지. 내 정신이 온전히 내 것인 날이 없었는데 음악이라니, 언감생심.

등교를 못 하고 집에 있는 아이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대충 집안일을 끝내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소파에 앉았다. 거실 창으로 기운 햇살이 들어와 집안을 덥혀주어 따뜻했다.

‘내일이 오면/사라져 버려질 것들에게 더 이상은/정을 주지 말자/
내일이 오면/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 사라질 거야/너무 걱정 말자‘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멈칫했다. 이건 마치 나를 위한 기도 같았다. 그 순간에 래퍼는 진심을 다해 나의 축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신부이자 비구승과 다를 바 없었다.

래퍼의 마이크는 묵주가 되고 목탁이 되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종교인이 아니어서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성직자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정수리를 덮는 듯하고, 무릎에서 바닥까지 엎드린 노승의 깊은 심연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이유 없이 마음 한편이 벅차올랐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그렇지. 오후 4시는 위로와 떨림이 공존하는 시간이지.
문득 자신의 마음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 오후 4시만 되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는 어떤 이의 고백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오후 4시도 덩달아 함께.

일요일 오후 4시만 되면 내일이 올까 하는 불안감이 어김없이 들던 때가 있었다.
일요일 오후 4시는 약속을 잡아 나가기도, 그렇다고 하루를 끝내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다시 시작될 일주일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내일에 꼼짝없이 붙잡힌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반복되는 현재의 답답함과 미래에의 불안함에 내일이 오지 말았으면 싶기도 했다. 오늘이 끝이기를.
내일이면 사라지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나 자신일까 봐 무섭기도 했다. 내게 내일은 지겹도록 두려운 것이었다.
스스로를 세상 가장 미약한 존재라 여겼던 나는 아무것에도 정을 주지 못하고 지독한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길 원했던 시각도 오후 4시였던 걸 보면 어쩌면 그 시각은 자신의 나약함을 도저히 숨길 수 없어 누구에게나 외로운 시각이 아닐까.

일주일마다 돌아와 나를 엄습하며 괴롭히던 시각이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나자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제 그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내일이 와도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줄 가족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덩그러니 홀로 오후 4시를 맞아본 탓일까. 외로움이 밀려왔다.
20대의 외로움과는 전혀 다른 40대의 외로움이.
내 인생 시계는 현재 오후 2시를 지나 4시를 향해 가고 있다. 젊음의 끝과 늙음의 시작점인 그 시각을 향해 틀림없이 가고 있다.
한여름 같은 인생을 사는 누군가에겐 오후 8시도 환하게 느껴지겠지만 삶이 오후 6시만 되어도 어두컴컴해지는 겨울 한복판에 놓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에 있을까. 나의 밤은 몇 시쯤 찾아올까.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고 오직 잠들기만을 기다리는 그 시간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요즘 TV에 방영 중인 드라마 '나빌레라'는 발레 무용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이다.
그의 인생에 엄혹한 밤 시간이 닥쳐왔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꿈이 한줄기 빛이 돼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 시계는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시각을 따지는 건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암흑 속에서도 어떤 소중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나는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이런 상념들이 노래를 타고 난데없이 마음을 덮쳐왔다. 오늘 오후 4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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