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비밀

by 하유미



독서반에 들어간 건 다분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2월에 들어서야 이사로 피폐해졌던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는 느꼈다. 산책을 하며 조금씩 동네를 알아가던 중에 ‘시민인문학교’라는 간판을 내건 건물을 발견했다. ‘시민’과 ‘인문’과 ‘학교’로 떼어 놓고 읽어보니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시민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있어 ‘시민’이라는 단어는 항상 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든다. 인문학에 대한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관심의 근원적 이유 또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채무감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내 인생의 목적을 40대가 된 지금 다시 조정해 본다면 인문학을 공부하여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나아가 제대로 된 한 사람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스스로를 정리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부담 없이 한 번 나오라는 말에 덜컥 그러겠다고 답을 한 것은 전혀 나답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럴듯한 필연적 이유가 내 안에 있지 않았을까 짜 내 보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항상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닫는, 소위 뒷북치는 습성 탓이다. 같은 이유로 이제껏 나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 보고서를 써대느라 진 빠지는 삶을 살았다.

어설프게 들어갔지만 철학 책을 읽어 내는 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학창 시절에도 생전 안 하던 예습 복습을 다해가며 애를 쓰고 있는 중인데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런데 재미가 있다. 교수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가 두 시간 동안 눈 감고 코끼리 더듬는 기분일 때가 많지만 그 먹통의 시간이 지겹지 않은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수업이 즐거운 데는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님들 덕분이 크다. ‘까다로운 책’이라는 티를 팍팍 내는 철학서를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내게 본인들의 이야기로 쉽게 풀어내 주시는 말씀들은 훌륭한 참고서가 되어 주었다. 수업 첫날 내게 그냥 편안하게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라고 말씀해 주신 성희 님의 마음을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맨 처음 전화로 어떤 곳인지 문의를 했을 때 한 번 마실 와보라는 말로 꼬드겨 정말 커피 한잔하는 데인 줄 알고 덜렁 한 발을 담그게 해 주신 정아님, 시 한 구절을 암송하실 때 시에 대한 사랑이 듬뿍 느껴졌는데 알고 보니 정말 시인이신 지연님, 차분히 공부하시는 모습이 무척 단아해 보이는 이름도 아름다운 입분 님, 항상 질문을 던져 수업을 더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이제는 귀갓길 동지가 된 성희 님과 남숙 님, 내색하지 않아도 오랫동안 공부하신 내공이 절로 드러나는 태훈 님.
궁금한 것, 모르는 것 투성이인 신입생에게 언제든 귀 기울여 주시는 든든한 친구님들이다.

그런데 오늘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성희 님께서 불쑥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런데 유미 쌤이랑 태훈 쌤이랑 말 억양이 똑같지 않아요?”
“아, 제 고향이 경남이에요.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긴 한데 티가 나나 봐요?
“와아안전 나죠. 대구 사람이 들으면.”
“그런가요. 저는 잘 못 느끼겠는데.”
“특히 책 읽을 때 확 표가 나요. 듣다 보니 두 분이 억양이 똑같은 거라.”
“하하하.”
“유미 쌤 고향이 어디예요?"
“창녕이에요.”
“어! 태훈 쌤이랑 같네. 어쩐지 둘이 성도 같더라니.”
“어머. 태훈 쌤 창녕 어디쯤이에요?”
“읍입니다.”
“저도인데.”
같은 본이니까 서로가 할아버지뻘이나 할머니뻘일 수 있다며 다들 왁자하게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한바탕 소동에 당사자 두 명 중 한 명은 괄괄스레 웃고 언제나 차분한 한 명은 어쩐지 살짝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자다가 그러니까 그게 오늘 새벽인데 한참 어지러이 꿈을 꾸는 중이었다. 살짝 깨 ‘오늘따라 꿈을 심하게 꾸네.’라는 생각을 하는데 순간 송곳 같은 기억 하나가 무의식을 뚫고 들어와 잠이 확 달아났다.

‘그래. 맞아! 그런 이름이 있었지.’

자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나는 초등학교 동창인 것만 같은 이름 하나를 기억해 냈다. ‘하태훈’. 물론 그전에도 태훈 쌤이 하태훈인 건 알았지만 동기생 중 하태훈이란 이름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태훈 쌤은 하태훈이지만 하태훈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창인 것만 같은 이름’으로 떠올린 것은 정말 그런 이름이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아서이다. 심지어 계속 말똥히 눈을 뜨고 있으니 그에게 형이 있었고 ‘하태경’이었다는 것까지 떠올랐다. 물론 이것 역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런데 내 기억은 하태훈의 형은 하태경이라고 알려주었다.

안타깝지만 글을 이렇게 급작스레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은 내 기억을 믿을 수 없거니와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이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친정에 있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뒤져보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시시하게 전자의 방법으로 내 기억의 비밀을 알아내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진짜 하태훈 일지도 모르는) 그는 어딘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재미난 선물 보따리를 건넨 것 일수도 있다. 몇 년 사이 내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친정을 방문해 이 사건이 내 기억의 조작인지 기억력의 승리인지 풀어 볼 생각을 하니 무척 기대가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후 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