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을 빙빙 도는 느낌인 것 같아도 분명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음악 대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졸업작품으로 -음악이 포함된- 게임을 만들었다.
장르는 텍스트 어드벤처. 슈퍼마리오같이 조작이 주가 되는 장르가 아니다. 글을 읽고 선택지를 골라 다양한 결말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중심인 장르이다.
이름은 <쥬스>였다.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황폐한 화성 땅에 있고, 다른 남자 과학자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가 외계인을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만 썼는데도 더는 생각하기 싫어서 'To Be Continued...' 하고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소재는 괜찮다, 라며 격려해주던 대학교 아르바이트 동료의 말이 큰 위안이 되면서도 씁쓸했다.
두 번째는 달랐다. 이야기에 집중하지말고, 게임답게 컨텐츠를 넣으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4학년 마지막 해에 룸메이트였던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헐, 화성에서의 *스타듀밸리는 어때?"
"헐, 너무 좋은데?"
짜릿하고 즐거웠다. 몇 십개의 기획서 페이지, 끝나지 않는 회의, 추가되는 아이디어, 달콤한 상상...
시간이 지나 다른 팀원들이 합류하고, 프로젝트는 잘 되어가는 것 같았다.
팀원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컨텐츠들을 마구 추가했다--농사, 낚시, 계절별 이벤트, 출석 이벤트 등등.
몇달 후 어느날이었다. 회의는 5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전투 컨텐츠를 추가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나는 그게 너무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썼던 이야기와의 궁합이 맞지 않았다. 나는 개연성에 대해 열심히 연설했다. 그러자 컨텐츠를 위한 이야기를 추가하자고 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이건 아닌데...'만 반복했다. 회의가 어색한 긴장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 이후로 더 이상의 컨텐츠 추가는 없었다. 아니, 컨텐츠들을 죄다 삭제했다. 이야기라는 컨텐츠 빼고.
세 번째 갈아엎기. 이 때의 마음상태는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초조함'
좋은 이야기 쓰는 법에 관한 책도 사서 읽어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게임을 만드는지 유튜브 영상들도 많이 찾아봤다. 각 등장인물별로 Q&A도 썼다. 사건을 나열해놓은 플롯도 작성했다. 밤을 새며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챗지피티도 사용해봤다. 넘쳐나는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이어붙일지 몰랐다. 심장이 빨리 뛰고, 눈 앞이 깜깜했다. 이젠 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모은 팀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초안은 기승전결 중 '기'에서 '승'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의 분량이었다. '승', '전', '결'은 정해진 시간 안에는 못 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졸업작품을 만들 당시의 마음 상태를 탑재해 'To Be Continued...'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챗지피티보다 더 똑똑해보이는 클로드라는 AI를 사용하는 팀원이 있다. <슬로하이츠의 신>이라는 책을 추천해준 OO님.
"유미님, 저도 스토리 도울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쓴 아이디어들 메모장에 있는 내용들 전부 다 보내주세요."
OO님은 인공지능 클로드와 함께 기승전결을 뚝딱 완성해내셨다. 여기저기 손봐야할 곳이 많았지만 어쨌든 결말이 있는 이야기였다. AI에게 바둑 싸움에서 진 이세돌 님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됐다. 패배감은 뒤로하고, 이 이야기로 데모 게임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했다.
공모전 데드라인까지 당일 전 이틀을 밤샜다. 인생 처음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나였는데 그걸 어기고 OO님이 코딩하는 화면을 지켜보며 수정할 부분을 체크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흘러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제출했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제출한 작품을 감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이걸 끝까지 끌고갈 가치가 있는지 평가했다. 결론은 '엎고 다시하자'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쥬스>를 내 손으로 다시 쓸 수 있다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정확히 네 번째 갈아엎기다. 팀원들에게 선언했다. 시간을 좀 많이 주세요. 일주일? 안되면 이주일이요. 이전보다는 덜한 압박감으로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야기가 막힐 땐 챗지피티나 제미나이에게 질문을 던지며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써내려갔다. 막힐 땐 신경질이 났지만 전처럼 머리를 싸매며 아무말이나 적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컴퓨터를 끄고, 다른 무언가를 했다. 그러면서도 온 신경이 <쥬스>에 집중됐다. 이 이야기 하나만 믿고 길게는 몇 년이든 개발을 지속할 수 있어야해. 적어도 퇴고라도 할 수 있게 기승전결을 완성시켜야만해. 캐릭터를 살아 숨쉬게 해야해. 몰입할 수 있어야해.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까지 생각해야만 해. 떡밥은 하나하나 숨겨놔야해. 데모에 포함했던 이 내용은 살려야 해. 그런데 새로운 아이디어와 연결짓기가 힘들어. 아니야 할 수 있어. 나는 결말까지 갈 수 있어. 아, 괴롭다. 유튜브를 찾아봐. 챗지피티한테 물어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했지? 이 시간들을 견딘거야? 무슨 잡생각을 하는거야, 이야기를 쓰란 말이야.
어찌저찌 완성시켰다. 꽤 만족했다. 에필로그 장면을 쓸 때는 창피하게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해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웠다. 나는 나를 향한 모든 반응이 긍정적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이 육감 하나로 중학교 때 유학을 결정한 것도 있다. 부작용으로 실망감은 배가 되지만 예상이 적중했을때만큼 짜릿한 기분도 없다. 완성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진지한 태도로 읽는 팀원들을 보면서 또 눈물이 났다. 이런 사람들과 인연이 닿은 것이 기적같았다. 뜨뜻미지근한 태도여도 '고생했다', '이야기가 괜찮다', '더 수정하면 되니까 이렇게 가자'... 의 피드백이라면 피아노 콩쿨에서 은상은 받은 느낌이었다. 은상은 대단하다.
꼬매야할 부분이 많았다. 정확히는, 더 길게 풀어나가야할, 크기가 큰 세계관을 무리해서 급하게 끝낸 느낌. 아마도 여전히 존재하는 압박감 때문일거다. 손가락에 폭군이 휘두른 회초리 자국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욕조에서 뜨뜻하게 몸을 담구고 두 손을 조심스럽게 물에 담갔다. 휴식을 취하자 자국들이 옅어졌다. 생각을 비우고나니 다른 문제들이 보였다. 이야기만 해결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기다렸다는듯이 다른 문제들이 '나도 풀어줘!'하며 달려들었다. 이 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냥 혼자 소설책을 낼걸. 왜 게임을 만들겠다고 난리였을까.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를 담을 시스템이었다. '게임으로서 매력이 없는 것 같다'는 평을 받은 공모전용 데모 게임보다 더 나은 게임을 만드려면 시스템도 재밌어야했다. 다시 읽어보니 시스템에 맞추려면 이야기도 많이 손봐야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압박감을 다시 느끼기 싫었다. 나는 약했다.
"제가 너무 고집을 부리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이건 잠시 중단하고 아예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게 어떨까요."
"어, 갑자기 이런다구요?"
"맞아요,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아트 팀원도 합세했다.
"<쥬스>가 저희 정체성이기도 하고... 유미님 마음 이해는하는데..."
"맞아요, 아트 방향성도 새롭게 바꿔서 열심히 해보려했는데..."
나는 이미 생각을 굳혔다. 경직된 허리를 빳빳이 펴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누가 돈을 내고 이 게임을 하고싶을까요?"
"..."
"..."
"이렇게 이어가도 좋지만 저는 꼭 3월달에 독립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돼요."
마음이 아팠지만 이렇게라도해야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그들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초조해졌기때문에 그냥 쥬스를 잊어주었으면 했다. 이번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심사숙고해서 써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재촉한 적은 없었지만말이다...
그래서 우리 팀은 지금 공포게임을 만들고 있다. 한가지를 밀고 나가는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을 빙빙 도는 느낌인 것 같아도 분명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적어도 내가 글을 진심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이걸 놓지 않을거라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은 확실하다. 열정이 샘솟는다. 포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