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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02. 2017

문제 제기만으로도 완성되는 카피

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분투기

주말은 무조건 ‘빨래하는 날’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도 아니고 꼬박 이틀은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가장 먼저 아이 빨래를 돌린다. 그다음은 수건이나 속옷이 있는 흰 빨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지나 색이 있는 두꺼운 윗도리가 있는 검은 빨래다. 근데 이 세 그룹을 모두 돌리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밑에 집에 너무 피해가 갈까 봐 (세탁기 돌리는 소리 때문에) 나눠서 아이 옷과 흰 빨래는 토요일에 검은 빨래와 양말은 일요일에, 이런 식으로 한다. 그래서 빨래 건조대도 3개나 된다. 평일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이니 세탁기를 돌릴 수 없다. 그렇게 주말에 빨래를 몰아서 하다 보니 어떤 날은 빨래하다가 주말이 다 지나간 기분이 들곤 한다. 한 주쯤 건너뛸까 생각도 했지만 그다음 주 2배가 될 빨래를 생각하면 현기증난다.


이번 주에 읽고 있는 ‘아주 긴 변명’은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져 국내 개봉했는데 나는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는 보통 평이 좋으면 책으로 먼저 읽는다. 이 영화 또한 원작이 매우 좋다는 장강명 작가의 트위터를 보고 즉시 구입, 일독 권유 지수 별 다섯 개에 솔깃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섬세한 묘사력을 지닌 책이 아닌가 싶을 만큼 일상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행동, 심리, 감정 등을 매우 디테일하게 잘 표현했다. 그만큼 공감되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특히 아내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자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집안일을 하나 둘 해 나가는 장면에서 세탁기를 돌리는 장면이 있는데,


세탁조 안이 꽉 차도록 들어간 빨래는 바지락 국물 같은 색의 물속에서 거의 움직이지를 않는다. 아침 통근 전철에 꽉꽉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있는 하느님 같은 기분. (82p)


‘바지락 국물 같은 색’이라니! 너무 딱이지 않은가. 빨래를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무조건 세탁기 안에 빨래 넣고 세제 넣고 물 넣으면 끝인 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색이나 소재별로 분리해 줘야 하는 건 물론 빨래의 양과 세제의 양도 중요하다. 꾸역꾸역 집어넣은 빨래에 세탁기는 동작 버튼을 눌러도 당연히 시원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물의 양에 비해 세제가 적어 뿌연 바지락 국물 같은 색이 되는 건 당연하다. 왜 이럴까, 하고 위에서 세탁기를 내려다보는 심정 또한 통근 전철에 꽉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과연 그렇다. 나는 빨래 양이 좀 많다 싶으면 일단 일부 빨래를 넣고 그 위에 세제를 뿌리고 다시 빨래를 넣고 그 위에 또 세제를 뿌린다. 마치 시루떡 만드는 것처럼 층층이 쌓는 기분으로.


아, 그래서 오늘 팔고자 하는 상품은 손빨래 비누다. ‘아주 긴 변명’의 주인공이 세탁기를 돌린 날 쓴 일기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소설 속 문장:
톰브라운 셔츠에 묻은 미트 소스 얼룩,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니시카와 미와 ‘아주 긴 변명’ 중에서>

laundry Soap

셔츠에 미트 소스 얼룩이 묻었다면 당연히 손빨래, 즉 애벌빨래를 해서 세탁기에 넣거나 아예 처음부터 손빨래를 해야 한다. 세탁기에 그런 디테일함이 있을 리 없다. 애당초 세탁기가 돌아가지도 않을 정도로 잔뜩 넣었다면 더 그렇다. 저건 아마도 그냥 담갔다 꺼낸 수준일 것이다.
나도 손빨래는 따로 안 하고 지내다가 아이가 옷에 뭘 자꾸 흘리기 시작하면서 최근 빨래판을 다시 구입했다. 딸기즙은 잘 빠지지 않는데, 아이가 흰 옷에 딸기 국물을 흘려 재빨리 손빨래를 하려는데 빨래판이 없으니까 영 어설펐다. 어설픈 빨래를 끝낸 뒤 쿠팡 로켓배송으로 다음 날 빨래판과 빨랫비누를 배송받았다.


카피:
세탁기에 넣은 지 57분 뒤.
줄무늬 셔츠에 묻은 미트 소스 얼룩,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일단 소설 속 문장 그대로 카피에 적용해도 될 만큼 심플하다. 다만 브랜드명이 들어가서 그 부분은 흔히 알 수 있는 스트라이프 셔츠로 바꿨다. 전후 과정을 좀 소개하기 위해 세탁기에 빨래를 넣었다는 걸 써줬는데 57분이란 길고 구체적인 시간이 디테일을 보여준다. 57분은 실제로 우리 집 세탁기를 일반 세탁으로 설정했을 때 돌아가는 시간이다.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세탁기 돌려 봤자 내가 줄무늬 셔츠를 세탁기에 넣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얼룩은 손빨래를 해야 된다는 것.


얼룩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결과에 따른 문제 제기만으로도 세탁 비누를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이 빨랫비누를 쓰면 얼마큼 깨끗해지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저런 경험이 있는 고객들은 손빨래 비누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나도 손빨래 비누 사야겠단 생각이 든다면?



*글에서 언급된 상품은 에디터 개인의 선택으로

해당 브랜드나 담당 엠디의 추천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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