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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08. 2017

언제부터 행거는
옷을 쌓기 위해 존재했나?

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분투기

얼마 전 큰 맘먹고 무인양품에서 트리 행거를 샀다. 오동나무로 만들었다고 쓰여있었다. 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다른 옷걸이는 3만 원대에 구입할 수 있지만 이건 10만 원이 훌쩍 넘었다.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걸 사자는 남편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생긴 것도 심플하니 예뻤다. 다만 그건 옷을 몇 개 걸지 않았을 때, 즉 옷걸이 자체로만 봤을 때 얘기였다. 우리 집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나자 그 옷걸이는 더 이상 단아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던 스탠드 옷걸이가 아니었다.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가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척척 쌓아놓은 티셔츠와 바지들 때문이었다.


옷이 쌓여 있는 옷걸이는 흡사 아이스바를 연상케 했다. 그러니까 손잡이 나무막대만 보이고 위에는 그저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 옷걸이 곁을 지나다니면서 혹여 옷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행거가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쩔 땐 기우뚱하기도 했다. 비싸게 주고 산 원목 옷걸이가 이대로 작살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왜 옷걸이를 샀을까? 이 옷걸이의 용도는 옷을 거는 건가, 쌓는 건가, 수납하는 건가. 그 옷걸이엔 내 옷도 몇 벌 걸려 있지만 대부분이 남편 옷이어서 나는 생각날 때마다 남편에게 옷걸이 좀 정리할 수 없느냐고 말했지만 알았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 그는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75센티미터 높이의 옷걸이에 옷을 계속 쌓는 채로 몇 주만 지나면 옷들이 천장에 닿을 듯했다.
쓰러지지 않는 게 용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 방에 있는 옷걸이뿐만 아니라 직사각형 형태의 전신 거울 양 모서리에도 집업 후드를 걸어놨다. 옷이 많은 걸까, 옷걸이가 부족한 걸까? 둘 다 아니다. 그냥 우리 부부는 만사 귀찮고 게으른 거다. 당장 편하면 그뿐인 거다.


소설 속 문장:
방 안에는 냉기만이 감돌았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어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더미 같은 옷걸이, 버려진 채로 방치된 것 같은 박스들,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찌그러진 맥주 캔들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박현욱 ‘그 여자의 침대’ 중에서>


상황이 이런데 이 문장이 어떻게 와 닿지 않을 수 있겠나. 정말 우리 집 옷걸이야말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더미 같은 옷걸이였다. 자, 비단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짐작하면서 카피를 써보려 한다. 이 문장에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만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니 해결책이 될만한 옷걸이를 제시해주는 게 좋겠다. 일단 이 옷걸이는 스탠드형이다. 일명 트리 행거라고도 불린다. 개별 옷걸이 없이 옷을 그대로 가지에 척척 걸어놓을 수 있는 형태. 그렇다면 가로로 길게 걸 수 있는 행거가 대안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가로형 행거에도 옷을 얼마든지 걸쳐(?)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카피를 응용해 내가 팔고자 하는 상품은 행거가 아닌 행거에 걸 수 있는 옷걸이 되겠다.


카피:
매일 입는 거니까, 툭툭 걸쳐 놓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더미가 된 옷걸이.
이제 쌓지 말고 하나씩 걸자, 기분까지 가지런히.

옷걸이는 옷을 쌓는 게 아니다. 옷을 걸쳐놓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거는 거다. 소비자의 잘못된 생활 패턴을 먼저 인지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문제점을 드러내 준다. 소비자 또한 아침저녁 옷을 걸쳐 놓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쇼핑몰에서 고객 스스로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을 먼저 집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라면 당장 구매하진 않아도 위시리스트에 담아 놓기까지 정도는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우리 집 옷걸이 문제 해결부터 해야되는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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