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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15. 2017

랩 가사처럼 라임 맞춰 쓰는 카피

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분투기

애정해 마지않는 황정은 작가의 ‘파씨의 입문’을 읽고 있다. 여러 단편이 실린 소설책으로 총 9개의 글이 실려있다. 그중 오늘 이야기하려는 ‘디디의 우산’에는 초등학교 동창인 디디와 도도가 성인이 되어 케이, 제제, 씨씨, 피비, 비비 등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장면이 나온다. 이름도 참 다정하다. 도도, 디디, 제제, 씨씨… 소설을 쓰다 보면 이름 짓는 것도 일인데 꼭 일반적인 이름일 필요 없다는 고정관념을 확 깨게 해주는 경우가 황정은 작가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여기 술자리를 표현하는 장면이 익숙한 듯 재미있다.


“찬비가 내린 날이었다. 디디와 도도와 케이와 제제와 씨씨와 피비와 비비는 탁자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흘리고 엎지르며 술을 마셨다. 케이는 만취하자 얼굴이 부었고 제제는 옆으로 누웠고 씨씨와 피비는 어느 연예인의 입성에 관해 웬일이니 웬일이야 험담했고 비비는 조는 듯 마는 듯 눈을 감았다.” p165


너무 친숙하다. 술자리에 꼭 등장하는 몇몇 유형을 간단하게 추려 놓은 것 같다. 다 먹어가는 안주와 술병이 즐비한 테이블 위로 사람들은 왜 자꾸 뭔가를 흘리고 엎지르는 걸까? 그 이유야 당연히 술 때문이겠지. 술잔을 놓치고, 안주를 집어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트리고 그릇을 쏟고… 서로가 서로를 말리지만 결국 다 쏟아지게 돼 있는 술자리. 쏟아 놓고 화들짝 놀라지만 정작 수습하는 건 어디선가 재빨리 행주를 들고 다가오는 종업원. 아이구, 너희 또 시작이구나, 하는 듯한 눈빛. 다 알고 있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는 와중에 도도와 디디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있다. 그들을 묘사하는 장면은 이렇다.



소설 속 문장:
도도는 별로 마시지 않았고 디디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황정은 ‘파씨의 입문’ 중 ‘디디의 우산’ 중에서>


별로 마시지 않고 별로 말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가 짐작이 간다. 자, 오늘 하고 싶은 카피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라임에 관한 것이다. 카피에 자주 쓰이는 방식이기도 한데 너무 자주 쓰면 신선함과 진지함이 떨어질 수 있다. 이 소설의 문장처럼 작가 또한 그 라임을 살린 것이 분명하다. ‘마시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라는 건 비슷한 느낌이지만 엄연히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읽기엔, 보기엔 하나로 인식된다. 바로 분위기다. 별로 마시지 않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이 뭘까. 왁자지껄 떠는 모습이 아닌 조용조용한 차분한 모습이겠다. 아니면 뭔가를 대단히 오래도록 생각하고 있거나.


최근 11번가에서 보내는 이메일 중 제목을 보고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던 적이 있다. 언젠가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어 따로 휴대폰에 메모해 두었는데, 하나는 곶감을 판매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는데 제목이 이랬다.


‘곶감이 곧감’


아마도 저 카피 쓴 사람도 대박이지 않아?라고 울쭐 했을 것 같다. 흥미롭다. 곶감을 주문하면 금방 간다는 뜻으로 곧 감을 넣었다. 내가 곶감을 사진 않았지만 클릭해서 들어가 보긴 했으니 절반의 성공일 것이다. 게다가 메모까지 해뒀다. 비슷한 예로 더 최근에 받은 메일 제목은 이랬다.


‘벤시몽 신고 싶옹’

프랑스 스니커즈 벤시몽을 판매하는 페이지다. 몽이라는 발음을 응용해 싶옹, 이라고 써줬다. 귀엽다. 곶감 썼던 사람이 쓴 걸까? 괜히 궁금해진다. 몇 개월 전에 사내 교육자료를 만들면서 29CM에서 판매하는 호박씨 기름에 관한 카피를 썼다.


호박씨유 기쁘게 소유

호박씨유 황홀한 소유’

실제 이벤트 페이지에 실린 내용은 아니었지만 라임에 관한 예시로 썼던 건데, 호박씨 기름은 다른 기름보다 가격이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걸 감안해서 비싸지만 소유할 가치가 있다, 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단어가 ‘소유’였는데 ‘씨유’와 ‘소유’가 비슷해 리듬을 살리면 다르게 인지되어 기억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소설 속 문장으로는 어떤 카피를 쓸 수 있을까?


카피:
별로 마시지 않는 사람과
별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 마주 앉았다.
잔 기우는 소리만으로도 괜찮은
밤이 기운다.


카피를 쓰면서 눈 앞에 그려졌던 풍경은, 아는 사람만 올 수 있는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술집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있다. 말이 없는 ‘김’이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말을 길게 늘어놓을 필요 없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마시지 않아도 되는 ‘최’와 따끈한 어묵탕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며 잔잔하게 앉아 있다. 진짜 편한 친구는 서로 아무 말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친구. 나 또한 그럴 수 있는 친구와 마주 앉아 머릿속을 텅 비워둔 채 밤을 지새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듯 카피를 쓸 때도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써줘야 한다. 그래야 읽는 사람에게 좀 더 쉽게 전달될 수 있다.이 카피에서는 마시는 않는, 말하지 않는 과 잔을 기울인다 와 밤이 기운다,의 두 가지 라임을 살렸다.


기획전 페이지나 이벤트 페이지에서 상품 이미지만큼이나 카피가 중요한 이유는 어찌 됐든 그 페이지에서 관심을 끌어야 상세 페이지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세 페이지로 옮겨져야 결제 단계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방법을 총동원해 보는 것이다. ‘곧감’이나 ‘싶옹’ 같은 카피는 자주 쓰기보다 뭔가 환기하고자 할 때 유용한 것 같다. 나 같은 고객처럼 한번 피식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는 것 또한 글(카피)이 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글에서 언급된 상품은 에디터 개인의 선택으로

해당 브랜드나 담당 엠디의 추천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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