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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r 22. 2017

우린 가끔 무언의 화해를 한다

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분투기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여기저기서 혼밥, 혼술 등을 이야기한다. 혼자 밥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 여전히 그런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는 사람이 없진 않지만 예전만 하진 않다. 나부터도 그렇다. 그게 뭐 어때서? 혼자 밥 먹는 게 어때서? 이런 식이 된다. 그렇게 혼자 사는 걸 즐기다가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깻잎 장아찌 먹을 때다. 두세 장이 한꺼번에 붙어 있는 깻잎을 한 장 떼어내려고 할 때 누군가 젓가락을 움직여 붙어 있는 그것을 떼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린 가끔 서러워지기도 한다. 그게 어디 깻잎뿐이겠는가. 김치도 그렇다. 제대로 썰지 않은 김치를 먹을 때면 누군가가 좀 잡아줬으면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등에 파스를 붙일 때, 원피스 뒷지퍼를 올릴 때 등 혼자가 서러운 때는 적잖이 우리 곁에 머문다.


오늘은 소설이 아닌 시다. 그런데 너무 소설 같은 시다. 소설에 비하면 시는 거의 읽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 내가 최근 읽은 허은실 작가의 ‘나는 가끔 설웁다’는 이런 시라면 소설만큼 흥미롭다할 정도로 시의 섬세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끔 설웁다’에 실린 많은 시가 대부분 소설만큼 많은 공감대를 주었지만 그중에서 ‘소수 3’이란 제목의 시는 글쎄… 시라기보다 소설, 혹은 시나리오 같은 느낌마저 준다. 이런 것도 시가 되는구나 싶은 마음에 시가 좀 더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남녀가 식탁에 마주 앉아 아침밥을 먹는다. 아무래도 살가운 사이는 아닌 듯하다. 미묘한 감정선이 오가는 사이 남자가 김치를 찢는다. 시는 김치 찢는 상황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말 그대로 눈앞에 선하다. 내가 그들의 식탁 나머지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남자가 김치를 찢는다 가운데에다 젓가락을 푹 찔러넣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하나 집어먹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가 젓가락을 최대한 벌린다 다 찢어지지 않는다 여자가 콩자반을 두 개 집어먹는다 왼팔을 식탁 위에 얹고 고개를 꼬고 있다(p82)


남자가 혼자 열심히 김치를 찢는 동안 여자는 콩자반을 먹는다. 남자의 김치는 내 알바 아니라는 듯 콩자반을 두 개 집어먹는 자세까지 심드렁하다. 말이 없는 두 사람의 식탁.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라면 김치 찢는 것을 재빨리 도와줄 것이다. 제대로 찢어지지 않는 김치를 열심히 찢느라 김치 양념이 여자의 밥그릇에 튀었다. 여자는 그래도 김치 찢는 걸 도와주지 않고 콩자반을 세 개째 집어 먹는다.


남자가 줄기 쪽에 다시 젓가락을 찔러넣는다 젓가락을 콤파스처럼 벌린다 김치 양념이 여자의 밥그릇에 튄다 여자가 쳐다보지 않는다 콩자반을 세 개 집어먹는다 남자가 김치를 들어올린다 떨어지지 않은 쪽이 딸려 올라온다 여자가 콩자반을 네 개 집어먹지 않는다 딸려 올라가는 김치를 잡는다 남자와 여자가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말없이 김치를 찢는다 (p82)


남자가 말없이 김치와 사투하는 사이 여자는 네 개째 콩자반 먹는 걸 멈추고 (드디어) 남자가 김치 찢는 걸 돕는다. 두 사람은 (이제 함께) 말없이, 밥 먹는 걸 중단하고 김치를 찢는다. 그렇게 김치를 다 찢어 놓은 두 사람은 다시 밥을 먹는다.
나는 여자가 젓가락을 들어 남자가 김치 찢는 걸 도와주는 순간이 바로 화해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무언의 화해를 하곤 한다. 뒷부분에서 두 사람이 화해했음이 더 확실해진다.


시 속 문장: 
김치를 전부 찢어놓은 남자와 여자가 밥을 먹는다 말없이 계속 먹는다 여자는 찢어놓은 김치를 먹지 않는다 깻잎 장아찌를 집는다 두 장이 한꺼번에 집힌다 남자가 한 장을 뗀다 깻잎 자루에서 남자의 젓가락 끝과 여자의 젓가락 끝이 부딪친다 찢어주느라 찢어지지 못한 늦은 아침 늙은 냉장고가 으음 하고 돌아간다
<허은실 ‘나는 잠깐 설웁다’ 중에서>

아무래도 여자는 김치보단 깻잎 취향인가 보다. 이번엔 여자가 깻잎을 먹으려 하자 남자가 자연스레 깻잎 한 장을 떼준다. 서로의 젓가락이 부딪힌다. 나는 이 마지막 부분이 너무 좋다.


‘찢어주느라 찢어지지 못한 늦은 아침’ 

우리가 파는 김치는 시장이나 대형 마트에서 파는 김치와 달라도 된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팔 때 상품에 대한 정보 전달은 필수다. 특히 음식은 더 신중하고 꼼꼼해야 할 것이다. 다만 파는 과정에서 한 번쯤은 이런 상황을 연출해줘도 좋다. 그러니까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는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엔 상품 즉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부부가, 연인이 화해하는 장면에 김치가 등장하는 것이다. 왜 그런 상황 있지 않나, 화해는 하고 싶은데 말로 하긴 좀 그렇고… 이런저런 기회를 살피는데 상대방이 혼자 김치 찢느라 끙끙댄다. 그때 젓가락을 척 들어서 무심한 척 김치 찢는 걸 도와준다. 감정이 쌓였던 앙금이 사르르 녹을 것이다. 김치를 화해의 용도로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입에 계속 침이 고였다. 맛있게 먹는 장면 하나 없는데도 맨밥에 김치 한 조각 올려 먹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섬세함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우린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김치의 맛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카피:
찢어주느라 찢어지지 못한 너와 나
우린 여전히 김치 때문에 산다

여기서 ‘김치 때문에 산다’에는 김치가 화해의 도구로도 필요하지만 여전히 우린 김치를 먹어야 산다는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다. 아무래도 이 카피는 영상적인 요소가 가미된다면 더 와 닿을 것 같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김치를 찢어주고 어색하게 밥을 먹고 난 뒤 서로가 안 보는 사이 피식 웃는 장면. 그러고 보니 이 김치 카피는 썰지 않은 포기김치에 더 잘 어울리려나~  



*글에서 언급된 상품은 에디터 개인의 선택으로

해당 브랜드나 담당 엠디의 추천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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