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분투기
"취업활동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는 물론 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체험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별로 대단치 않은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계속 얘기해야 하는 일이다." <아사이 료 '누구' 중에서>
‘누구’는 최연소 나오키상을 수상한 아사이 료의 장편소설이다. 2013년 이 책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이렇게 솔직한 소설을 쓰고 싶단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 작품은 인터넷이나 모바일 환경이 초래하는 커뮤니케이션과 개인 간의 관계를 솔직하고 철저하게 분석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재미있다, 정말 공감되네, 로 읽다가 나중에는 정곡을 찌르는 묘사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된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보고 쓴 것 같은…
안 그래도 요즘 쓸데없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보는 시간이 늘어서 자제하려 노력 중이다. 아주 잠깐만 보려고 켰는데 나도 모르게 30분은 우습다. 보지 않아도, 오히려 안 보는 게 좋았을 것들을 보는데 귀한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 나한테 꼭 필요한 내용도 아니고 반드시 봐야 할 이미지도 아닌데, 타인이 먹은 커피, 파스타, 자기에게 선물했다는 가방, 구두 등 이런 건 내가 왜 보고 있는 건가. 그렇게 보고 좋아요 눌러주면 그걸로 끝도 아니다. 내 현실을 뒤돌아 보게 되고, 얘는 오늘 성수동에 그 핫하다는 카페 놀러 갔는데 나는 뭐했나, 차라리 공원이라도 나가서 애랑 놀아줄 걸 집에만 박혀서 카봇만 열심히 보여줬네, 하고 신세 한탄이 끊이질 않는다.
안 보면 궁금하고 보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는 SNS. 오늘은 작정하고 안 보려 노력하려 출근길 지하철을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켜게 되는 휴대폰을 아예 꺼내지도 않고 책을 펼쳐 읽기도 했다. 아무튼 소설 ‘누구’는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젊은이들의 현실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
“짧고 짧은 말로 자아 내는 매일의 기록은 군더더기가 떨어져 나가 한입에 이미 배가 부를 만큼 진한 맛이 난다.”
“책상에 엎드려서 스스로 만든 어둠 속에서 버튼을 누르자, 작은 휴대전화의 큰 화면이 환해졌다. 네 자리의 비밀번호를 탭한다. 그 위치는 이미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다.”
“사진에는 작은 테이블 위에 비좁게 널린 캔 맥주, 편의점에서 사온 안주, 리카가 만들어준 문어 카르파초 등의 안주가 찍혀 있다. 오른쪽 위에 뻗어 있는 손은 내 오른손일 것이다. 사진은 보정을 해서 실제보다 더 색이 선명했다.”
그 가운데 가장 정곡을 찌른 부분은 여기다.
“줄곧 생각했던 거지만, 긴지, 아직 다 해내지 못한 단계에서 ‘이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고 어필하는 건 관둬. 각본을 다 쓰고 나니 아침이 됐더라, 어쩌고 하는. 그런 건, 공연이 전부 끝난 뒤에 할 말이지 않아? 누구누구하고 미팅 어쩌고 하는 건 공연 끝난 뒤에 ‘누구누구 님에게 조언을 받아서 만든 공연입니다’로 충분하잖아.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지 마. 그리고 요 며칠 사이 책을 몇 권 읽었느니, 연극을 몇 편 봤느니 그런 것도 아무 상관 없잖아. 중요한 건 수가 아니라고. 그리고 연극계 인맥을 넓히겠다고 늘 말하지만, 알아? 제대로 살아있는 것에 뛰고 있는 걸 ‘맥’이라고 하는 거야. 너, 여러 극단의 뒤풀이 같은 데 가는 모양인데,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과 지금도 연락하고 있냐?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러 갈 수 있어? 그거, 정말로 인‘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보고 있으면 딱하더라, 너.”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친구건 직장동료 중에 자신의 인맥을 유독 자랑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나는 그런 사람과 정반대의 부류라서 그런 그들의 인맥이 부럽다가도 유일한 자랑거리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이런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작가는 정확히 그 부분을 간파했다. 인맥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기서 언급하고 있듯이 ‘요 며칠 사이에 책을 몇 권 읽었느니, 연극을 몇 편 봤느니’ 이런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나는 워낙 책을 좋아해서 인스타그램에 지금 읽기 시작한 책이나 새로 구입한 책을 사진 찍어 올리는데, 그렇게 올린 책들을 반드시 다 읽는 것도 아닌데 마치 다 읽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나의 지적 영역 등을 어필하는 것처럼. 저 부분을 읽고 뜨끔하지 않을 사람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소설은 이런 젊은 사람들의 SNS 문제뿐만 아니라 취업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뭔가를 결심하고 작정했을 때 요새는 SNS에 그것을 의례 드러내고 시작하기 마련인데 그런 점의 문제에 대해 일갈하고 있는 게 오늘 살펴볼 소설 속 문장이다.
작가는 우리의 이런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형태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의 노력만 어필’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력만 어필한다… 누군가 검지 손가락의 날을 세워 가슴을 콕 찌르며 너 말이야, 너,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진짜 파이팅은 인터넷이나 SNS에 굴러다니는 게 아니라 ‘바로 바로 서는 전철 안이나 너무 센 2월의 난방 속에서 툭 굴러 떨어진 거라 말했다. 즉 생활 속에 있다는 뜻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뭔가를 시도해 봐야지, 하고 다짐하는 말을 백 번 끄적여봤자 밖에 나가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는 것만 못하다.
나는 이 문장을 이용해 어떤 상품의 카피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열심히 신어서 제법 낡아 버린 운동화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취업에 열정을 쏟고 있는,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젊은이의 스니커즈 말이다.
내가 이 작가를 기억하게 된 건 그의 소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 신분으로 글을 쓴다는 점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변하면 자신의 작품 세계 역시 변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더 없이 이해간다. 나도 글을 쓸 때 완전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게 더 어려운 것처럼 내 일상에, 생활에 경험이 녹아있어야 된다. 오랜만에 ‘누구’를 들춰 보다가 검색해 보니 영화로도 만들어졌단 기사를 보았다. 분명 책을 읽을 때 그 생생함이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겠다 생각했는데 역시. 국내 개봉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꼭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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