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작은오빠가 누나, 그만 좀 해,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넘치지도 덜하지도 않게 아주 적당한 톤이었다. 그러게 위로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누구를 벌써 황천길로 보내려고. 언니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런데 다 망했다는 큰오빠가 무슨 돈으로 수술을 할까. 혹시 치료비가 필요해서 모이자고 했나.
<김금희 ‘보통의 시절’을 읽다가>
아프면 비로소 보이는 것, 이라고 제법 거창하게 제목을 지었지만 사실 그냥 좀 아팠다. 지난 금요일부터 목이 칼칼한 게 편도선이 또 부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보통 이러면 밤에 잘 때 목에 손수건을 감고 자면 다음 날 한결 좋아진다) 다음날 더 심해졌다. 그러더니 목이 칼칼하고 미미한 두통까지 시작됐다. 주말에 하려던 이것저것을 간신히 마치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어쨌거나 매여사는 대놓고(?) 육아 에세이는 아니기 때문에 매번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안 하려고 하는데 내 삶이 빼도 박도 못하는 엄마이기도 한 터라 안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앞에 쓴 ‘이것저것’ 안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80% 이상이다. 특히나 이렇게 몸살로 끙끙 앓게 되는 병은 만사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증세라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아이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엔 벅차고 힘이 부친다.
다만 내 아들에겐 엄마 외에 아빠라는 존재가 또 있으니 그에게 바통을 넘긴 다음 침대에 몸을 묻었다. 이대로 잠들어 침대를 뚫고 지하 땅 속으로 깊이 꺼질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두통이 낫질 않아 머리가 무겁고 가래가 자꾸 생겨 목이 간질간질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먹는 거 좋아하는 내가 딱히 입맛도 돌지 않았다. 약은 먹어야 하니까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해결한 뒤 약을 삼켰지만 금방 개운해질 리 없었다. 약에 취해 곧 잠이 들었지만 자고 일어나도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나는 자꾸 내가 아프단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 죄책감의 대상자는 물론 아이와 남편. 무릇 집이란 아빠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플 때 더 축 처지기 마련이라 나의 아픔이 이 집안의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단 생각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내가 아프단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끙끙대며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서 가만히 누워있자니 먼 옛날 엄마가 떠올랐다. (당체 육아 아니면 친정 얘기밖에 할 말이 없는 거냐 나는) 당시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엄마가 어지럼 병이 심해서 한 번은 외출하셨다가 바닥에 쓰러지신 바람에 머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하마터면 대형사고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한두 바늘 꿰매고 마는 정도에 그쳤다. 그때 엄마는 머리에 붕대를 둥둥 두르고 집에 왔는데 그렇게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고 왔는데도 주방에 들어가 저녁밥을 짓는 거였다. 그때 나는 엄마의 아픔 같은 건 잊은 채 엄마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주방에서 밥하는 모습이 신기해 디지털카메라로 몰래 장식장 뒤에 숨어 엄마를 도촬 하듯 찍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딸이었다. 게다가 이 사실을 집에 없던 언니에게 전하며 엄마 너무 웃기지?라고 내가 찍은 사진을 공유하기도 했는데,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엄마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왔을 뿐 평소와 다르지 않아 더 그랬던 모양이다.
엄마란 그런 존재인 걸까? 내가 아이를 낳고 이렇게 몸살로 아파 보니 아파도 내 아이 먹일 밥은 챙기게 되더란 말이다. 어제도 머리가 깨지듯 아프고 온몸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는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냉동실에 얼려놓은 양지를 꺼내고 냉장고 채소 칸에서 절반 남은 무를 꺼내 소고기 뭇국을 뚝딱 끓여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유독 아이 밥 먹이는 것에 스트레스가 심한 남편을 대신해 밥만은 꼭 내가 먹이는데 이번에도 예외일 수 없이 아이를 앉혀 놓고 밥을 끝까지 먹였다. 나는 밥 생각도 없었다. 입이 썼다. 그렇게 아프니까 비로소 보이는 게 아들인 건가 싶지만 그건 아니고, 아프니까 보이는 건 나 자신이었다. 이런 나 자신.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적응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가련해지기까지 했다.
두피가 찢어져서 꿰맨 채로 저녁밥을 짓는 엄마를 보고 킥킥대던, 철딱서니라곤 눈곱만치도 없던 내가 자식 먹이겠다고 아픈 와중에 밥을 하고 있었다. 엄마니까 당연한 거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난 아닌 것 같다. 나도 어쨌거나 아이보단 내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산소마스크를 아이에게 먼저 씌워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착용하고 아이를 챙겨야 하는 것처럼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건강해야 아이를 챙길 수 있는 거다. 그러니 엄마들은 모쪼록 그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건강해져야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는 맛있는 게 있으면 엄마가 먼저 먹는 사람이었다. 출출하면 혼자 냉면 먹으러 휙 나가고 콩나물국밥이 먹고 싶으면 차 타고 또르르 가서 한 그릇 뚝딱 사 먹고 오신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개념보다 내가 먼저 좋아야 남도 좋아지는 타입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머리 다쳤을 때도 국이나 찌개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엄마가 약을 챙겨 먹기 위해 손수 밥을 지었던 것 같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그거 매우 현명한 거였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어디가 아픈 것 같으면 병원 가서 바로 체크한다. 본인이 건강한 게 자식들 짐 덜어주는 거라 생각하기 이전에 그냥 아프니까 가는 거다. 단순하게. 자식들 고생이야 2차적인 거고.
아픈 건 내 몸이 브레이크 거는 것이다, 쉬었다 가라고
아프니까 비로소 내가 보인다. 아이 먹이는 게 우선이라 나는 대충 끼니 정도 때우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기보다 집에 있는 진통제로 해결하려 했던 나. 지치고 고달파도 해도 가정의 평화를 위한 약속은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던 나. 참 피곤하게 살았던 나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태껏 대단히 희생하며 살았던 건 아니다. 그저 다 남들만큼 때로는 모자라게 지냈을 것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고만 노력했는데 그게 오롯이 나를 위한 건 아니었던 게 조금 후회될 뿐이다. 아픈 건 내 몸이 브레이크를 거는 거다. 내가 앉을자리 툭툭 치며 잠시 앉았다 가도 늦지 않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