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쓰고 싶은 쇼핑몰 카피라이터의 고군 분투기
잘 다려진 와이셔츠의 소매를 과감하게 툭툭 걷어 올리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가? 오후 5시까지만 해도 반듯하게 매어져 있었을 넥타이를 헐겁게 풀어놓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긴 남자를 본 적 있는가? 나는 본 적 있다. 심지어 많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나온다. 이런 유형의 남자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여자들이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을 좋아할까? 바로 흐트러짐, 즉 완벽할 것 같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불균형이다.
남자가 매력을 느끼는 여자도 다르지 않다. 일본 작가 구보 미스미의 ‘밤의 팽창’ 속 오가사 와라를 보는 유타도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싱글맘인 오가사 와라는 아이와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을 찾았다가 부동산 중개사인 유타를 만나 호감을 갖게 되고 나중엔 꽤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생각보다 자극적인 이 소설은 제목답게 밤을 팽창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즉 나의 밤이 더 넓어진 기분이랄까? 이런 책은 내가 주로 책을 읽는 지하철이나 카페가 아닌 집에서, 그것도 밤에 침대 머리맡에서 읽기 좋은 소설이다. 그만큼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야하다. 대놓고 야한 게 아니라 안 그럴 것 같은 책인데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그와 별개로 중간중간 공감되는 문장이 많아 생각보다 밑줄이 많은 책이기도 했다. 그만큼 일상에 닿아있는 성적인 묘사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이번에 말하려고 하는 소설 속 문장에서 핵심은 ‘불균형에 약간 가슴이 설레었다’이다. 오가사 와라가 방을 보러 온 전날과 달리 회사에 다녀온 뒤라 화장을 완벽하게 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밥을 먹었나?) 립스틱만 지워진 상태로 유타와 마주친다. 립스틱까지 완벽하게 바르고 있었다면 이런 생각이 절대 들지 않았겠지만 립스틱만 지워져 있었기에 거기서 오는 불균형이 그를 설레게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누드톤 립스틱이 떠올랐다. 간혹 여자들 중에도 피부나 눈 화장을 하긴 하지만 립스틱까진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건 취향에 따라, 즉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일 때 괜찮아 보이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딱 그만큼에서 멈춘 화장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 그 불균형을 즐기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즉 보는 사람의 그런 심리를 반영해 소설 속 문장을 이용하여 카피를 써보자.
누드톤 립스틱은 딱히 어필하기가 애매하다. 애초에 립스틱은 생기 있어 보이고 화사해 보이기 위해 바르는 거니까. 하지만 조금 가라앉아 보이고 한 톤 다운돼 보이게 만들 누드톤 립스틱은 어떻게 어필할까. 아파 보이고 싶은 날 바르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실제로 그런 용도로 많이 쓰이기도 하지만) 그런 걸 ‘불균형에서 오는 설렘’이라고 조금 멋지게 포장해 보는 거다. 게다가 불균형에서 오는 설렘이란 문구 자체로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가기 때문에 상품 광고에 대한 이해력 또한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된다.
나는 입술이 두꺼운 편이라 생각해서 립스틱을 바르면 그게 두드러지기 때문에 화장을 다 해도 립스틱은 바르지 않았다. (화장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 화장품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립스틱은 고작 한두 개다. 어릴 때 얘기다. 사실 20대만 해도 립스틱 굳이 안 발라도 불그스름한 입술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입술 색도 빠진다. (써 놓고 보니 너무 슬프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요즘은 바른 게 더 나아 보인다. 간혹 깜박하고 립스틱을 바르지 않고 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저 여자의 불균형에서 설렘이 느껴지는데,라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는 죽을 때까지 가꿔야 한다는 친정엄마의 말을 명심하며 오늘도 열심히 티 안 나는 메이크업을 하고 씩씩하게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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