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미 Aug 16. 2017

오래 보고 싶은 사람

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연애에 있어서 소심함은 별로 도움되지 않아. 적극적인 게 훨씬 이롭지. 그리고 너는 소심한 게 아니고 그 남자를 배려하고 있는 거야. 두고 봐. 그 남자도 오히려 고마워할걸?”




나보다 두 살 어린 수영은 3년간 남자친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전 직장의 거래처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술자리에 동석하면서 이야기가 잘 통해 사귀기까지 했지만 6개월이란 굵고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씁쓸한 이별을 해야 했다. 수영은 본인도 이렇게 오랫동안 남자가 생기지 않을 줄은 몰랐다며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곤 했다. 그러던 그녀가 얼마 전 소개팅에서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며 아주 오랜만에 두 볼이 발그레해져서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시원한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역시 소개팅은 기대를 안 하고 나가야 되더라고요.”
“굉장히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났나 보네?”
“완벽한 이상형까진 아니지만 이상형에 가까운 정도?”
“그럼 진짜 제대로 만난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무슨 문제 있어?”

수영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놓으려다 숨기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를 만났다며 싱글벙글하던 좀 전과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남자에 대한 고민은 남자한테 물어보는 게 빠르다며 그녀를 타일렀다. 수영은 계속 별거 아니라고만 했다.


“그게요, 진짜 별거 아닌데, 그냥 제가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라…”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래? 뭐, 그 남자 귀에 털이라도 났어? 하하하…”
“헙, 선배 어떻게… 알았어요?”
“뭐? 진짜야? 귀에 털이 났어?”
“네…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귀에 털 나는 건 할아버지들이나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렇게 젊은 남자 귀에 털이… 진짜 상상도 못했다니까요.”
“에이, 귀에 털 나는 건 나이에 상관없어. 내가 전에 잡지에서 봤는데 남자한테만 있는 Y염색체에 귀에 털이 나는 유전자가 있데. 보통 사람들은 다 귀에 털이 있는데 그게 솜털 정도여서 티가 안 날 뿐이지. 그 남자는 좀 진한 털인가 보네.”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무룩해진 얼굴로 테이크아웃 커피잔에 꽂힌 빨대를 뽑았다 꽂았다 반복했다. 진짜 이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데, 딱 한 가지 오류를 찾아낸 모양이다.

“모처럼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그깟 귀에 난 털이 무슨 문제라고 그래? 좀 친해졌다 싶을 때 네가 귀털 정리기를 남자에게 선물해봐.”
“귀털 정리기요?”
“응. 얼마 전에 대전에 사시는 아버지가 뭐 필요한 거 없으시냐고 물었더니 난데없이 코털정리기를 사달라고 하셔서 내가 좀 알아봤거든.”
“아버님은 왜 갑자기?”
“그야 모르지, 맘에 드는 아주머니라도 생겼는지. 아무튼 그래서 좀 알아보다가 괜찮은 제품이 보여서 보내드렸는데, 코털이랑 귀털이랑 둘 다 정리되는 기계더라고. 옛날에 나 어렸을 때도 아버지가 코털 정리기를 쓰셨는데, 그때는 막 뜯기기도 해서 코털 깎다가 갖은 인상을 다 쓰시는 걸 기억하거든. 근데 이거는 아프게 뜯기지도 않고 깔끔하게 잘린다고 좋아하셨어. 게다가 물로도 세척이 가능하고. 내가 무심한 것 같아도 아버지가 이렇게 가끔 부탁하는 거에는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알아봐서 보내드리는데, 이건 헤드 부분의 각도가 60도로 꺾여 있어서 콧구멍에 넣기도 좋더라고. 사실 나도 하나 샀어. 작아서 갖고 다니기도 편해서 늘 가방에 넣고 다니시면서 수시로 쓸 수 있거든. 어디서 샀는지 알려줘?”
“네! 알려주세요. 근데… 이런 걸 선물하면 그쪽에서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요?”
“지금 둘이 분위기 좋다며. 너 혼자 그러는 것도 아니고 남자도 널 맘에 들어 하고 있고. 그렇다면 이런 선물이야 고맙게 받지 않을까? 아, 그리고 머리를 깎으라는 것도 아니고 귀 털 정리하는 건데 뭘 그렇게 고민해. 괜찮아!”
나는 수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 원래 되게 소심하잖아요.”
“연애에 있어서 소심함은 별로 도움되지 않아. 적극적인 게 훨씬 이롭지. 그리고 너는 소심한 게 아니고 그 남자를 배려하고 있는 거야. 두고 봐. 그 남자도 오히려 고마워할걸?”


수영은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얼음이 반쯤 녹은 아이스커피를 빙그레 웃으며 호로록 마셨다. 나는 아주 잠깐 그런 수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애에 있어 소심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내 경험상 해준 말이었다. 나의 소심함 탓에 눈앞에 있는 수영을 이렇게 오랜 시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모처럼 수영에게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어필했다. 그건 아주 오랜만에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나 얼굴이 활짝 핀 수영의 미소를 오래도록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끝. 



<코털, 귀털 정리기 편>
*소설 속 상품이 궁금하다면 클릭


*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민한 당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