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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ug 24. 2017

드라이브 인 서머

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그제야 어딘가에서 흐르는 음악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릴 때부터 큰아버지의 트럭 안엔 늘 음악이 넘실댔다. 공부밖에 모르는 아버지와 달리 큰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음악과 책 읽기를 즐겼다. 




8월의 오후 2시 고속버스 터미널은 이마가 벗어질 만큼 강렬한 태양이 이글거렸다. 마중 나오겠다며 도착하기 20분 전에 전화하라는 큰아버지의 말을 깜박 잊은 나는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부랴부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큰아버지, 저 도착했어요.”


안 봐도 보이는 수화기 너머 화들짝 놀란 큰아버지의 탄식에 나는 천천히 오셔도 돼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25분쯤 기다리니 터미널 입구 코너 끝에서 한눈에 알아볼 만큼 낡은 검은색 구형 트럭이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섰다. 죄송한 마음에 터미널 광장 바깥에서 기다리느라 얼굴이 벌겋게 익고 땀을 뻘뻘 흘린 난 큰아버지의 차가 미끄러지듯 멈춰 선 뒤 냉큼 올라탔다. 조수석은 에어컨 바람으로 차가웠다. 


“미리 전화하라니깐. 그리고 왜 밖에서 기다려, 이렇게 더운데!” 


나는 배시시 웃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말로는 방학을 맞아 포도 수확을 도와드리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용돈이라도 벌고자 내려온 거였다. 이때는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도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보니 괜찮은 알바 자리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큰아버지는 핸들을 돌리며 나를 힐끗 쳐다보곤 아프지 않은 꿀밤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제야 어딘가에서 흐르는 음악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릴 때부터 큰아버지의 트럭 안엔 늘 음악이 넘실댔다. 공부밖에 모르는 아버지와 달리 큰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음악과 책 읽기를 즐겼다. 지금도 큰아버지의 집엔 낡은 LP 판이 빼곡히 꽂힌 책장이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근데 좀 이상했다. 음악소리가 스피커에서 나는 게 아닌 듯 답답하게 들렸다. 


“근데, 휴대폰으로 음악 들으시는 거예요?”

“아, 이거? 얼마 전에 영수가 휴대폰으로 음악 듣는 걸 깔아줬어. 

언제든 내가 듣고 싶은 걸 찾아 들을 수 있어서 여간 편한 게 아니더라구. 신세계야 신세계.”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의 낡은 트럭에는 블루투스 기능이 없어 차내 설치된 스피커로는 휴대폰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기 음향을 제일 크게 해서 들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큰아버지는 신세계를 만났다며 좋아했다. 큰아버지 댁에 도착하자마자 영수 방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큰엄마는 오늘은 피곤할 테니 좀 쉬라고 했다. 나는 좀 전에 먹은 콩국수를 소화시키며 개 놓은 이불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휴대폰으로 자주 가는 편집숍에 접속해 ‘그것’을 주문했다. 




며칠 후 포도밭에서 오전 일을 하고 돌아오자 큰엄마가 내 앞으로 온 택배라면서 작은 박스 하나를 건넸다. 나는 곧장 상자를 뜯어 큰소리로 큰아버지를 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숨넘어가겠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트럭 운전석에 태운 뒤 나 또한 조수석에 올라탔다. 놀란 큰아버지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큰아버지, 이제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 차에서도 크게 들으실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차엔 블루투스인가 뭔가 그 기능이 없는데? 영수 말이 그게 돼야 들을 수 있다던데?”


나는 말로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박스에서 블루투스 엔진을 꺼내 미리 준비해둔 스테레오 케이블과 연결한 뒤 자동차 AUX 구멍에 꽂았다. 


“휴대폰 좀 줘보세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게 넘긴 큰아버지는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었다. 큰아버지의 휴대폰 ‘설정’에 들어가 페어링을 하니 ‘ASOME 연결됨’이라고 메시지가 떴다. 곧바로 영수가 깔아줬다는 음악 앱을 켜 좀 전까지 포도밭에서 큰아버지가 들었던 음악의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들어보세요.”


나는 천천히 동그란 스피커 볼륨을 돌려 소리를 키웠다. 큰아버지의 낡은 자동차 스피커로 레이 찰스의 ‘Hit the road jack’이 흘러나왔다. 크고 선명하게 들리는 사운드에 눈이 휘둥그레진 큰아버지는 손가락만 한 블루투스 엔진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게… 뭐냐?”

“음… 그러니까, 신세계요, 큰아버지가 기다리던 신세계.”


신통방통하다는 듯 웃는 큰아버지를 보며 멋쩍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포도 수확을 돕는 것보다 뿌듯한 기분에 나부터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내 볼륨을 좀 더 크게 올린 큰아버지는 기어를 넣으며 말했다.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끝. 


<블루투스 엔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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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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