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그 시간에 선미가 먹을 수 있는 아침은 한정적이었다.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의 팬케이크, 에그머핀, 해시브라운 같은 조식 메뉴나, 전철역 입구에서 노파가 쪼그려 앉아서 파는 옥수수, 바람떡, 노점의 포장마차에서 파는 김밥 등이었다.
<김금희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을 읽다가>
가끔 짧은 소설 쓰기를 즐긴다. 누가 읽어주든 노트북에 그대로 저장돼 있든 간에 자기만족에 가까운 글쓰기다. 먼 훗날 이런 소설 쓰기를 계속해서 문학이라는 큰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갈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어쨌거나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그리고 좋다, 재미있다는 평을 들었을 때 가장 행복한 법이니까. 며칠 전 책을 한 권 샀다. 시리즈 제목이 따로 있는데 ‘짧아도 괜찮아’다. ‘짧아도 괜찮아 1’의 제목은 ‘이해 없이 당분간’으로 작가들의 손바닥 소설과 에세이를 모아 놓았다. 어디선가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보고 그날 점심시간 합정 교보문고에 달려가 즉시 사버렸다. 문고본 사이즈에 얇고 가벼운 책이었다. 첫 장은 (내가 애정 하는) 김금희 작가의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이었다. 읽는데 너무 좋아서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필타(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치는 일)를 했다. 필타를 하면서 다시 읽고 인상적인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밑줄 그은 부분은 원고에 색을 달리해서 표시해놨다. 신촌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선미라는 여자가 아침식사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별일이라곤 딱히 없는 이 소설이 너무 좋아서 또다시 이런 글이 쓰고 싶어 졌다. 바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말이다.
긴장하며 보지 않아도 되는 '삼시세끼'
그날 저녁 퇴근하면서 이런 글만 모아서 책을 만든다면 어떨까?라고 상상해 봤다. 사건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모아 놓은 소설집. 그건 우리 대부분의 일상에 가깝다. 사실 우린 별일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요즘 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삼시세끼’와 ‘나 혼자 산다’ ‘효리네 민박’ 정도이다. 특히 ‘삼시세끼’는 재방송은 물론 재탕, 삼탕까지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이 프로그램이 왜 이렇게 좋을까, 왜 기다려질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하며 보지 않아도 된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느라,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못 봐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아이패드로 다시 보기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는데 소리만 들어도 왠지 모를 마음에 위안이 된다. 딱히 대화가 오고 가지 않는데 음식이 끓는 소리나 장작불을 떼는 부채질 소리만 들어도, “아 더워, 더운데 뭘 먹어야 하지?”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요” 같은 말만 들어도 편해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면서…
스마트폰을 열어 페이스북만 봐도 이게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일인가 영화인가 싶을 만큼 별일이 다 있는 요즘이다. 한편으론 나는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어쩜 사건 사고가 이렇게 많은지 되려 감사하게 될 지경이다. 한때는 이런 자극적인 사건 사고 보는 게 너무 힘겨워서 페이스북 앱을 지워버릴까 생각도 했다. 아마 자극적인 기사에 시달리는 게 버거운 사람들이 한 번쯤 해봤을 고민일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일상이라고 내가 사는 삶에 대해 불만을 쏟아 놓을 때도 있지만 사고 없이 출근해서 다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일 또한 대단한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물론이고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별일 없는 것에 무한한 감격을 느낀다.
모든 글에서 가치를 찾을 필요는 없다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가상의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런 책이 실제로 있다면 읽을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도대체 누구에게?) 소설의 플롯엔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어서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고 삶이 바뀌는 재미가 있어야 할 텐데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보통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동료 한둘과 건물을 빠져나가고 가끔은 커피를 마시고 일을 하고 다시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삶에 대한 글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긴 굳이 모든 일에서 가치를 따질 필요도 없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을 성실히 해나가면서 하루를 일주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다정한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삼시세끼’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전과 허탈과 키득거림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탄이 전부인 것을 공감할 수 있으면 된 거겠지. 그런데 사실 그런 단편은 꽤 많다. 앞서 잠깐 언급한 ‘이해 없이 당분간’에서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요 며칠 이 책을 업무와 업무 중간에 한 편씩 읽고 있다. 4, 5페이지가 분위기 쇄신과 두뇌 전환에도 탁월한 ‘분량’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이런 글들을 읽으며 좋다, 참 좋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서,라고 다음 책을 찾아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당신에게도 오늘 하루 별일 없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