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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by 이유미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살아온 그녀는 세상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을 것이다. 햇빛에 눈이 부시면 백화점에 들어가 선글라스를 사고 우산 없이 외출을 했는데 소나기가 내리면 택시를 잡아타면 되는 것처럼.

<김민정 ‘홍보용 소설’을 읽다가>




글의 주제를 고민하다가 ‘발표가 두려워 2탄’을 쓰려고 마음먹고 나니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알 수 없는 이 웃음의 의미는… 뭐랄까, 전에 그렇게 당해놓고도 또 이걸 한다고 했구나, 싶은 어이없음에 대한 비관이랄까.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어쨌거나 말 그대로 발표를 ‘또’ 하게 되었다. 이번엔 사태가 더 심각하다. 1시간 정도의 발표가 아니라 무려 3시간짜리다 그것도 3회에 걸쳐서 말이다. 아, 이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왜 한다고 승낙을 했을까?


지난번 발표의 경우 사내 강의 2회와 외부 강의 1회가 있었는데 그 문제의 외부 강의 날 있었던 일이다. 강의는 오후 3시였고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꽤 많이 내렸다. (벌써 4개월 전이다) 장소는 강남이었는데 비가 오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땐 점심을 먹고 여유 있게 시간을 맞춰 지하철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근데 비가 많이 내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그냥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합정역에서 선릉역까지 평일 오후니 넉넉히 3, 40분이면 갈 줄 알았다. (밖에 잘 안 나가는 집순이의 판단이 그렇지 뭐) 하필 그날이 평일이지만 주말이나 다름없는 금요일이었고 합정과 선릉은 넉넉히 1시간 반은 잡아야 한다는 걸 몰랐으니. 이렇게 예측 시간 판단만 잘못했으면 이렇게 인상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날 수업 후 참관한 수강생들 중 10명에게 내가 쓴 책 ‘사물의 시선’을 나눠주려고 10권을 챙겨갔는데 택시 타기 전 역 앞 약국에 우황청심원을 사 먹으러 들렀다가 책이 든 쇼핑백을 놓고 나온 것이다. 나는 책을 두고 왔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택시를 타고 20분가량 지났을 때 떠올렸다. 아, 그때의 식은땀이란… 비가 오니 정신없이 우산만 챙기고 쇼핑백은 약국 소파에 내려놓고 청심원을 마시느라 잊고 나온 것이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택시 내비게이션에 예상 도착 시간을 보니 3시 10분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2시 40분쯤엔 도착해서 준비하려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강의 시간은 늦었고
증정하기로 한 책은 두고 오고...


겨드랑이에서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일단 택시 기사님께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말하고 강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도착시간이 3시를 넘길 것 같은데 어떡하냐고, 뿐만 아니라 책을 약국에 두고 왔다고(이쯤 돼선 그냥 울고 싶었다) 이실직고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담당자는 일단 강의 시간은 10분 정도 늦춰보겠다고 말했고 책은 다음에 우편으로 보내달라며 차분한 음성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약국에 전화해서 쇼핑백의 안부를 묻고 월요일에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 그래도 외부 강의가 처음이어서 긴장되는 판국에 이중삼중으로 난리가 난 것이다. 전화를 끊고 속으로 망했구나,를 중얼대며 비 내리는 창 밖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택시를 타기 전 마신 소화제와 우황청심원이 탈이 난 건지 눈앞이 하얘지고 구토 증상을 동반한 멀미가 시작된 것이다. 빨리 가달라고 했으니 다시 천천히 운전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가 들이치거나 말거나 창문을 최대한 열고 찬바람을 맞았다.


이대로 강의를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그때 그 컨디션이었다면 나는 병원을 가야 하는 게 맞았다. 발표의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20분 늦게 강의실에 도착했고 부랴부랴 노트북을 켜서 발표 자료를 띄웠는데 HDMI 연결 잭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PT자료를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보냈고 그의 노트북에서 파일을 열었더니 폰트가… 세상에 폰트가 굴림체로 뜨는 것이다. 디자인을 화려하게 한 건 아니지만 깔끔한 폰트로 준비한 시간이 굴림체와 행간이 어긋난 글자들을 보는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20170921_29cm_illust_가로_lyc.jpg illust by 이영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던 최악의 하루였다. 무슨 정신으로 강의를 마쳤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끝은 났다. 다행히 강의를 주관했던 담당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후기를 들었고 강의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쓴 카피를 가져와 나의 의견을 묻는 직원들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걸어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명치가 꼬이기 시작했다. 망쳤다는 생각에 홀가분함이 전혀 없었다.


예측 불허한 모든 상황에 이토록 예민한 내가 이걸 또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다니! 나는 요즘 밤마다 이불킥을 날리며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사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10월 말경에 나올 예정인 나의 새 책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대와 얼마간의 강의료 때문에 주저하면서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는 요즘 같아서는 돈이고 뭐고 이렇게 걱정될 거였으면 왜 한다고 했을까, 내 판단이 너무 회환된다. 더군다나 강의 날짜가 보기 좋게 추석 황금연휴 전과 후로 나란히 잡혀서 나는 이번 연휴를 단 1도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추석특집을 보면서 매 시간마다 이 강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완벽한 강의는 못할 거란 걸 받아들이자


이번 강의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이 너무 후회되어 자못 심각하게 정말 못하겠다, 안 한다고 담당자에게 털어놓을까, 하고 남편에게 진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사내 강의할 때 당신 정말 달라 보였어. 내가 알던 이유미가 아니었다고. 이번에도 잘할 거야. 자신감을 가져.”


물론 이 대답 속에는 내가 벌어들일 얼마간의 부수입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걸 그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의 격려를 듣고 나니 40% 정도의 용기는 생겼다. 이미 하기로 한 일, 벌어진 사태, 어쩌겠는가? 내가 결정했지 남이 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다. 이 판단에 후회를 하면 할수록 나는 더 위축될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전문 강사가 아니고 여러분과 같은 직장인이다, 라는 걸 강조하기로 마음먹으니 한결 부담이 줄었다. 사실 이 모든 건 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면 쉬운 문제다. 철저해지려는 욕심이 밤마다 이불킥을 날리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 없다. 하루빨리 나는 완벽하게 강의를 끝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분명히 얼마간의 실수도 있을 예정이고 반대로 ‘의외로’ 잘 해낼 수도 있다. (이렇게 또 기대를 하는 나) 못할 것이라는 예측의 두려움보다 반드시 끝은 난다는 사실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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