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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Oct 01. 2017

감격스럽게 살기 편한 세상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바닷가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네 앞에 앉아서 제일 맛있는 과일을 네 입에 넣어주고 싶어… 너한테 잘 어울리는 귀걸이도 골라주고 싶고, 네가 머리를 잘랐을 때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해주고 싶고, 네가 넘어지면서 나를 꼭 붙드는 모습도 보고 싶고, 네가 새 신발을 살 때도 네 곁에 있어주고 싶어. 

<파비오 볼로 ‘내가 원하는 시간’을 읽다가>




최근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겼다. 생후 6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던 아이는 이제 만 2세가 되었고 친정 엄마의 이사로 종일반을 하게 되어(더이상 친정 근처에서 다닐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집 근처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사실 옮기고 나니 마음도 몸도 편한 게 사실이다. 다행히 내가 퇴근이 5시라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6시가 되기 때문에 종일반이어도 큰 무리가 아니다. 어린이집 옮기기 전엔 좀 거리가 있어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아이를 데리고 다시 집까지 차로 2, 30분을 가서 저녁을 먹이기에 시간이 너무 늦어져(7시 반이 넘는다) 어린이집에서 원장님이 아이 저녁을 대신 먹여주셨다. 아이에게 밥을 먹여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밥 먹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대신 먹여 준다면 그게 편할 것 같지만 엄마로서 제 아이에게 하루 삼시세끼 중 한 끼도 직접 먹이지 못하는 건 마음이 그리 편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제 집 근처로 옮겼으니 집에 도착하면 6시 반이 채 안 된다. 당연히 저녁밥은 (소원대로) 내가 챙겨 먹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 한 끼도 직접 먹일 수 없던 워킹맘 


그렇다고 내가 뭘 대단히 잘해 먹이는 건 아니다. 그저 따뜻한 밥, 국, 반찬 한두 가지지만 엄마인 내가 직접 아이 입에 넣어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뿐. 전날 미리 해놓지 않으면 집에 도착해서 국 끓이고 반찬 만들 시간이 없어 나도 마트에서 완전조리식품을 종종 사다 먹인다. 근데 이 조리식품, 먹어볼수록 너무 잘 만드는 것 같다. 지난 중복엔 딱히 어딜 가지 않아서 아이와 단 둘이 이마트에서 봉지에 파는 삼계탕을 사다 먹었다. 뜨거운 물에 봉지째 넣고 중탕한 뒤 그릇에 담으면 끝. 반신반의하고 먹어봤는데, 웬걸 너무 맛있는 거다. 쌀밥 꾹꾹 말아서 야들야들한 닭고기 살 찢어 먹이니 아이도 잘 먹는다. 그 뒤로 각종 국이랑 반찬을 마트에서 배달시켜 먹는다. 이런 걸 경험할수록 옛날 우리 엄마세대는 너무 힘들게 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illust by 이영채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음식으로는 우유가 전부인 줄 알았지만 요즘은 아니다. 두부, 계란, 과일은 물론 정육과 제주도에서 잡은 회까지 집 앞으로 배달되는 세상이다. 아이가 과일을 잘 먹어서 챙겨주긴 해야 되는데 한 종류를 많이 살 수밖에 없어 남은 과일이 늘 냉장고 야채 칸에서 썩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최근 알게 된 과일 배달 서비스를 시도해 봤는데 제철 과일 중 알아서 보내주니 세상 편할 뿐만 아니라 양도 포도 한 송이, 오렌지 두 개, 키위 두 개, 자두 세 개, 바나나 두 개 등등 적은 양을 깔끔하게 개별 포장해 아이스박스에 담아 배달해주니 남아서 버릴 염려도 없고 여러 가지 과일을 골고루 먹일 수 있어 눈물 날 정도로 고마웠다. 꾸준히 시켜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출근하자마자 과일을 주문하는데, 뭐가 이렇게 편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물건들이 세상 편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아이에게 먹이는 음식은 무조건 엄마가 직접 재료 사서 손수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마들도 있을 것이다. 방부제도 많이 들어갔을 테고 어떻게 만드는지 내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건 어느 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패스. 나는 내 방식대로, 그저 엄마도 편하고 아이도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라고 판단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감정에 휘말리느니
놀이터 한 번 더 가자 


그렇게 주문을 하고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결제하고 나니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구나, 싶다. 내 몸이 편해지는 만큼 지불하는 돈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처사. 그래도 일하는 엄마는 이렇게 돈으로라도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감사할 따름이다. 세상엔 ‘워킹맘이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평일 오후’처럼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있으니 말이다. 그저 나는 음식 하느라 싱크대 앞에 서서 아이를 등지는 것보다 (충분히 맛있는) 조리식품 빨리 먹이고 좀 더 많은 시간 안아주고 눈 맞추는 쪽을 택한 거다. 매미가 사라지고 잠자리가 파란 하늘을 종횡하는 가을이다. 오전에 주문한 소고기 뭇국은 저녁이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진한 국물에 흰밥 말아서 연한 살 쪽쪽 찢어 아이 입에 쏙 넣어줘야지. 죄책감? 그것도 어찌 보면 사치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감정에 휩싸여 있느니 아이 손잡고 놀이터 한번 더 나가는 게 낫다. 아, 정말 감격스럽게 살기 좋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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