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가방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다. 서너 살 때부터 이십대 중반을 넘길 때까지. 그 뒤로는 집에서 직장까지, 직장에서 다시 집까지, 잠깐 마트에 갈 때도 가방을 들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 우리는 가방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가방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노예들보다 그들이 든 가방 속을 먼저 확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유 ‘커트’를 읽다가>
열흘이라는 긴 연휴를 마치고 출근하는 아침, 나의 커다란 숄더백에는 책이 무려 네 권이나 들어있었다. 한 권은 연휴 기간 짬짬이 읽던 소설책이고 나머지는 모두 업무에 관한 책이었다. 다음 주에 있을 강의 준비도 있고 해서 연휴가 기니까 집에서 열심히 해야지, 하고 책을 바리바리 싸갔던 건데 네 권 중 한 권만 반 이상 읽고 나머지는 거의 펼쳐보지도 못했다. 욕심이 과했던 건지 내가 게을렀던 건지, 아니 둘 다였던 것 같다.
물론 이런 결과를 예상 못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노트북은 펼칠 꿈도 꾸지 않았다. 다만 아이가 낮잠을 자거나 밤에 잘 때 짬짬이 책을 읽고 밑줄만이라도 그어 놓자고 결심했었다. 밑줄 그어 놓은 부분은 연휴가 끝난 뒤 출근해서 정리하기로 했던 건데, 늘 그렇듯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아이가 낮잠을 자면 2시간은 거뜬히 자니까 그때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애 잠들기 기다리다가 나도 덩달아 같이 자버리기 일쑤였다. 추석 앞 뒤로는 당연히 양가를 갔다 와야 하니 포기했고 추석이 지난 다음엔 경주로 2박3일 경주 가족 여행이 있어서 그 기간도 뺐지만 나머지 이틀마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순삭’이다. 연휴가 좀 남았을 때는 책도 잘 안 읽히더니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는 책이 왜 그렇게 잘 읽히던지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다 잤다. 딱 시험기간에 청소가 신나던 그 기분이다.
두 배는커녕 원래 해야 할 양도
못 채우고 있는 나
잠들기 전 인스타그램을 잠깐 보다가 내가 팔로잉하는 사람이 책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의 한 구절을 적어 놓은 걸 읽었다.
“인정을 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연습한 대로 연주해요. 하루에 여덟 시간을 연습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배 더 준비해야 해요.”
시모어 번스타인은 아흔을 넘긴 피아노 연주자로 지금도 여전히 실내악단들과 함께 객원 연주를 계속하고 정기적으로 여러 국제 경연대회의 심사위원도 맡고 있다. 그는 뉴욕에서 개인 교습을 하며 뉴욕 대학의 음악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책은 그의 인터뷰를 담은 것으로 그의 유년시절 유대인 아버지와의 갈등부터 한국전쟁 참전 그리고 연주자 데뷔와 스승과의 갈등과 은퇴, 교습법에 이르기까지 아흔 해 인생을 고스란히 담았다. 나는 이 책을 임경선 작가의 트위터에서 보고 그녀의 아낌없는 극찬에 호기심이 생겨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놓고만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평을 아끼지 않는 걸 보니 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어쨌든 우연히 만난 이 문장에 나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두 배는 더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데 나는 어떤가, 두 배는커녕 원래 해야 할 양도 못 채우고 일을 미루며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흘려 보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올 해 말에 카피 관련 책이 한 권 나올 예정이고 내년 봄에도 출간 예정인 에세이가 있다. 본격적으로 원고 수정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제대로 원고를 살펴볼 수 없으니 집에서 작업해야 하는데, 집에 있는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걸린 건지 켰다하면 팝업창이 어마어마하게 떠서 AS를 한번 맡기러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계속 노트북 핑계만 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연휴 초입에 ‘브런치’에 연재하는 글을 깜박하고 올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 노트북의 전원을 켰는데 너무 쌩쌩하게 잘 돌아가는 것 아닌가. 뿐만 아니라 문제의 그 팝업창도 하나도 뜨지 않았다. 누가 나 몰래 노트북을 고쳐놓기라도 한건가 싶게 말이다. 머쓱해진 나는 얼른 원고를 업데이트하고 노트북의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다시 전원을 껐다. 노트북이 망가졌다는 건 그냥 내가 믿고 싶었던 게으른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어떤 걸 하고 싶다면 일단 그걸 해야 된다
아이가 잠들면 해야지, 청소를 끝내고, 설거지만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글 쓰는 일을 미루고 있다. 작가 김연수의 책 ‘소설가의 일’에서 그는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쓰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이런 저런 핑계는 필요 없다는 뜻이다.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일단 써야 할 것 아닌가. 어떤 걸 하고 싶다면 일단 그걸 해야 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말을 했다.
“문장이란 양적으로 많이 쓰면 확실히 좋아진다. 그러나 자신 속에 곧은 방향 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은 재주로 끝나고 만다.”
어쨌거나 군말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일단 잠을 좀 줄이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난다는 핑계로 저녁에 아이 씻기고 재우는 시간에 나도 같이 잠들 때가 많았다. 평균 8시간은 꼬박 자는 건데 컨디션은 좋을 지 몰라도 내가 이루려는 꿈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한두 시간이라도 잠을 줄이고 낮에 하지 못했던 진짜 ‘내 일’을 해야겠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들의 삶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봤는데 글감을 얻기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난다거나 느긋한 산책을 한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나같이 다들 일정하게 주어진 시간에 반드시 뭔가를 썼고 그걸 매일 이어나갔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머릿속으로만 생각만할 게 아니라 단잠을 이겨낼 줄도 알고 가진 걸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손에 움켜쥔 것은 놓으려 하지 않고 나에게 부족한 것만을 갈구하며 살아온 건 아닌지. 두 배 더 준비하자. 그래, 딱 두 배만 더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