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책을 챙기지 않으면 나로서는 여행 가방이라는 걸 아예 꾸릴 수조차 없다. 책 한 권도 없이 어딜 간단 말인가? 당황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김경 ‘너라는 우주에 나를 붙이다’를 읽다가>
살다 보면 별 일 다 있다. 그중에는 남이 겪은 일을 보고 와, 내 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은 것도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진짜 내 경우가 되었을 때의 황당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여행을 가면서 짐 가방을 빼놓고 비행기를 타는 드라마틱한 일은 나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믿고 살았지만 삶은 그렇게 쉽게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어이없네~’가 내 일이 안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9월 중순께 언니네 식구와 친정엄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에 도착하는 2박 3일 짧고 단출한 여행이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몇 번 제주도에 갔지만 대부분이 겨울 아니면 초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에 제주도를 가본 적이 없어서 이번 여행이 왠지 더 기대되기도 했다. 이미 제주도를 다녀온 주위 사람들이 요즘의 제주도는 말 그대로 천국이라며, 완전 좋을 거라고 기대를 한껏 높여 놓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기로 했다. 아이는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 집에 맡기고 출근을 일찍 해서 공항 가는 길 아이를 태워가기로 계획했다. 목요일 밤 12시까지 집안일을 하고 짐을 싸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중간 크기의 캐리어에 아이와 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날 회식이어서 늦게 집에 돌아와 본인 짐은 따로 싸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까’를 반복하며 계속 담았다
‘혹시 모르니까 해열제는 꼭 넣어야지. 체온계도 넣고, 감기에 걸릴지 모르니 콧물감기약이랑 이마에 붙이는 쿨패드도 넣자. 사진에 예쁘게 나와야 하니까 모자도 넣고, 아이 옷은 점퍼 2개, 바지 3개, 티셔츠는 혹시 모르니까 아주 많이… 믹스 커피는 꼭 마셔야 하니까 봉지 커피도 담고, 잠들기 전 읽을 책도 담고, 내 바지는 두 벌 정도는 넣어야지. 속옷도 넣고 혹시 모르니까…’ 혼자 중얼거리며 짐을 싸길 한 시간. 2박 3일 여행에 뭐가 그렇게 가져갈 게 많은지 나는 입버릇처럼 ‘혹시 모르니까’를 반복하며 가방을 꾸렸다. 짐을 다 챙기고 거실 한가운데에 캐리어를 반듯하게 챙겨 놓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금요일 아침 서둘러 아이를 챙기고 세 식구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남편이 깜박했다는 듯 소리쳤다.
“아! 지갑! 일단 먼저 내려가. 들어가서 가져올게.”
혼선을 빚은 남편을 향해 나는 0.2초 정도 인상을 찌푸리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캐리어를 끌고 아이와 함께 주차장에 도착한 뒤 아이를 일단 뒷좌석에 태웠다. 마음이 급한 나는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운전대를 잡아 주차장에서 차를 뺀 뒤 남편을 건물 현관에서 기다렸다. 내려오면 바로 탈 수 있게.
다행히 모든 게 내가 예상한 대로 착착 진행됐다. 나는 O형이라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굉장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까지 챙기고 메모해 놓는 습관이 있다. 머리보다 손을 믿는 편이다.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을 했다. 12시까지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지하철과 택시를 타고 어린이집에 도착. 아이를 픽업해서 어린이집 앞에 주차해 놓은 차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 남편과 나는 차 안에서 김밥과 사이다를 먹으며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며 김포공항을 향해 달렸다. 날씨도 끝내주고 모처럼 여행에 괜히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렇게 40여분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고 친정식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3, 40분을 빨리 도착해 왠지 평소 나답지 않게 여유로웠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남편이 짐을 내리기 위해 트렁크를 열었다. 뒤 따라 내린 내가 아이를 내리기 위해 차 뒤쪽으로 걸어가는데, 남편이 말했다.
“근데… 캐리어는 어딨어?”
나는 순간 얼음, 일시정지. 할 말을 잃은 남편과 나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며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주차장이다. 빌라 주차장. 거기에 캐리어를 두고 온 것이다. 지갑을 두고 왔다는 남편이 다시 집으로 올라가고 내가 먼저 아이를 태우고 캐리어를 실어야 했는데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던 것. 남편은 내가 잘 실었겠지 생각하고 그대로 차에 탄 것. 아, 이런 일이 나에게도 벌어지는구나.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시 돌아가긴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캐리어를 찾아야 했다. 남편은 빌라 단톡방에 주차장에서 파란색 캐리어 보신 분 있느냐는 글을 남겼다. 잠시 후 302호 아주머니께서 캐리어가 있다, 고 말했고 자초지종을 말하자 본인이 맡아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안심까지 시켜주셨지만, 마음이 편해질 리 없었다. 그래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꼼꼼한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한껏 의기소침해진 나는 울적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제주도에 내린 우리는 이마트부터 찾았다. 기저귀를 사고 2박 3일 동안 입을 속옷과 티셔츠를 샀다. 바지 욕심까지 부릴 순 없었다. 다행히 남편은 자신의 짐을 배낭에 따로 챙겼기로서니 나와 아이 물건만 사면 됐다. 클렌징과 기초화장품은 함께 여행을 간 언니와 함께 쓰고 숙소에서 입을 옷은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패턴의 엄마 몸빼 바지를 뺏어 입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보는 것도 여행
캐리어가 터질 듯 꽉꽉 채운 물건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여행을 즐거웠다. 날씨가 다했다고나 할까.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9월의 제주도는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그렇게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우리 가족은 긴 명절 연휴 동안 경주에 가기로 했다. 나는 다시 한번 짐을 싸야 했다. 제주도 여행에서 가방을 놓고 갔던 게 짐 싸기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걸까? 짐 싸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꼭 필요한 생필품 외에 아이 옷은 딱 입을 것만 계산해서 넣었다. 좀 더러운 거 한 번 더 입히면 어떠나 싶어 바지도 딱 두 개만 챙겼다. 겉옷은 입고 간 거 하나, 내 옷도 바지 하나에 티셔츠 두 개만으로도 충분하단 걸 깨닫고 딱 그만큼만 넣었다. 전과 달리 가방이 널널했다. 짐 없이 살아보니 정작 여행에선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내보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캐리어를 두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그 황당함은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당혹스러운 이 여행도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단 의미에서 내 인생에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