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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Oct 28. 2017

가을을 툭툭 차며 걸었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내가 혼자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날.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고 생각한다. 동네 아이들 가운데에서 늦은 편으로, 좀처럼 보조바퀴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겁쟁이였던 것이다. 저녁, 엄마와 함께 집 앞에서 특별 훈련을 하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좀더 세게 밟아."

"몸을 똑바로 펴."

그게 안 되니까 못 타는 거 아냐!

조금 화가 났었다. 마침내 탈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정말로 기뻐서 해가 지도록 집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꿉친구인 남자애가 걱정하면서 내 뒤를 따라 돌아주었다.

<마스다 미리 ‘어른 초등학생’을 읽다가>




배우 김희선이 엄마로 나와 아이에게 카레를 준다. 아이가 한입 맛보고 너무 맛있는지 감탄하며 “엄마가 다했어?”라고 묻는다. 그러자 김희선이 씽긋 웃으며 “아니, 카레가 다 했어.”라고 답하는 카레 광고. 카레가 다한 엄마 밥상처럼 날씨가 다 한 주말이었다. 연휴 이후 내내 이런저런 핑계 삼아 주말에도 집에만 콕 박혀 있던 우리는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는 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 밖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토요일은 바람도 안 불고 날씨도 쾌청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남편은 자동차 지붕에 자전거를 매달고 트렁크에는 아이의 세발자전거를 싣고서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해가 짧아졌다는 걸 감안했어야 했다. 나들이 안 해본 티가 난다. 집안일 좀 해놓고 낮잠 자는 아이를 간신히 깨우니 오후 4시. 목적지인 여의도 한강공원까지 가려면 5시가 훌쩍 넘는다는 내비게이션의 친절한 안내에 남편과 나는 재빨리 단념, 차를 돌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노을을 받으며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 밖으로 나갔다

일요일, 포기할 수 없는 주말 나들이에 재도전. 일찍 밥을 먹고 아이가 낮잠 잘 시간에 출발. 아이는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고 한 시간 남짓 달려 여의도 한강공원에 도착했다. 오후 3시 반. 토요일보다 바람이 꽤 불었지만 볕이 워낙 좋아서 나들이하기에 좋았다. 남편에게 1시간 자유시간을 주며 자전거를 타고 오라고 한 뒤 아이를 세발자전거에 태워 탁 트인 강가를 거닐었다. 그 순간만큼은 센트럴 파크 부럽지 않았다. 자전거 작은 트렁크에는 요플레 한 개와 물티슈 그리고 어린이 야채주스 하나를 넣었다. 중간에 작은 벤치에 앉아 요플레 하나를 맛있게 비웠다. 아직은 스스로 페달을 돌리지 못해 뒤에서 유모차처럼 밀어줘야 했다. 그래도 안 내리려고 하고 얌전히 앉아 있어 수월했다. 기운 찬 강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산발이 되거나 말거나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왠지 뿌듯했다. 역시 나가긴 귀찮아도 나오면 좋다. 카푸치노 광고에나 나올 법한 뭉개 구름이 예쁘게 떠 있던 오후, 한강을 찾은 사람들은 꽤나 행복해 보였다. 아이의 자전거를 밀며 이리저리 둘러봐도 모두들 미소 띤 얼굴이었다. 연인, 가족, 친구, 모임, 제각각 다른 이유로 만나 한 마음으로 한강을 찾았을 것이다.

illust by 이영채

주말에는 되도록 집에 있고 싶어 하는 나는 원래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다. 그나마 아이가 생기고 난 뒤에는 워낙 집에 있는 게 힘드니까 덜 힘든(안 힘들진 않다) 밖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사람들은 어찌나 그렇게 잘 다니는지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하트를 누르지만 혀를 내두르는 나를 본다. 특히 맞벌이 부부들은 주말에 해야 할 집안 일도 많을 텐데 그 바지런함에 부러움 섞인 감탄을 한다. 나는 일주일간 밀린 빨래를 하려면 하루는 족히 써야 하던데. 돈은 또 어떻고. 어디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못해도 2, 3만 원은 깨진다. 커피만 마실 수 있나. 밥도 사 먹으면 5만 원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사실 어차피 한 끼 먹는 거 물가가 워낙 비싸니 외식 값 걱정에 안 나간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요일 한강 나들이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왜냐하면 한강이 보이는 편의점에서 ‘끓여먹는 라면’을 처음 맛보았기 때문. 자전거를 다 타고 근처 쇼핑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가려는 나에게 남편이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라면을 안 먹고 가냐면서 편의점으로 끌고 갔다. 아이에게는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주고 끓여먹는 라면을 두 개 가져와 빨간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빠르게 완성된 라면은 생각보다 너무 맛있게 잘 익었다. 게 눈 감추듯 라면 하나를 해치운 나는 남편에게 “이거 안 먹고 갔으면 후회할 뻔했어”라고 말했다.


걸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하긴 그렇다. 유명한 식당, 새로 생긴 카페, TV에 나온 맛집. 그런 곳에만 가려고 하니 돈이 아쉬웠던 거다. 밖에서 먹는 음식, 뭔들 맛있지 않을까? 하다못해 집에서 주먹밥을 싸와도 맛있었을 거다. 언젠가 한두 번 정도 아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한 적이 있다. 집 앞을 나서는 순간부터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 아이가 핫한 곳, 맛집, 유명한 장소를 어찌 알겠는가. 하다못해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 어딘가로 바쁘게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도 즐거워하는데. 그때 동네를 거닐면서 느꼈던 건 2년 이상 살았지만 이렇게 구석구석 살펴본 적이 없어 우리 동네가 낯설면서도 새로워 보였던 거였다. 그렇게 큰 느티나무가 있는 줄, 시냇물은 아니지만 물이 졸졸 흐르는 냇가가 있는 줄, 새로 그린 벽화에 우리 동네의 역사가 숨겨져 있는 줄 몰랐으니까. 걸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이 지천이었다. 벌써 바람이 차다. 가을은 성큼성큼 줄어들 것이다. 산책길에 자신이 주운 돌멩이에 이름을 붙여주며 얘들도 태워줘야 한다고 트렁크를 열어달라던 아들을 위해 다음 주말에는 어디로 나들이를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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