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네, 묵은 일기를 보면 즐거워요.
뭐든 숨김 없이 그대로 적은 거라서 혼자 읽어봐도 부끄러워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을 읽다가>
가끔 일기장처럼 사용하는 블로그에 ‘하나 또 넘었다’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글을 썼다. 전날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 왠지 모를 싱숭생숭함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잠이 들었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5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출근. 뭐라도 글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에 끼적인 글이었다. 지난주 월요일을 마지막으로 3주간 매주 월요일 퇴근 후 나는 강남으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을 탔다. 집으로 가지 않고 정 반대인 강남으로 향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강의를 위해서였다. 하루 3시간씩 진행하는 강의였다. 멋 모르고 수락했다가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안 뒤로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추석이 껴 있어 마음 편히 연휴를 즐기지도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을 더 번 셈이기도 했다. 첫 번째 수업을 하고 2주간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시간에서 1시간 30분짜리 강의는 가끔 했어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무려 3회에 걸친 수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첫 수업이 무엇보다 긴장되고 떨렸다. 무엇보다 뭘 이야기해야 하는지, 얼마나 자세히 들어가야 하는지 감이 쉽게 오지 않았다.
아마추어 티 팍팍 낸 첫 시간
첫날, 나는 어김없이 강의장 앞에 있는 약국에서 우황청심원을 사 먹고 들어갔다. 긴장감 속에 수업을 시작했고 70장 가까이 되는 PPT를 준비했음에도 2시간을 꽉 채우고 1시간이 남아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너무 아마추어스럽게도 수강생들에게 준비한 내용이 여기까지다,라고 실토했다. 다행히 남은 한 시간은 수강생들이 질문이 많아서 질의응답하느라 시간을 다 채웠지만, 프로라면 그렇게 ‘솔직’하진 않았을 것이다. 추후 강의 담당자에게도 그 부분에 대해선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준비한 강의가 2시간에 끝나버렸다고 해도 그걸 진짜로 대놓고 말할 게 아니라 남은 한 시간은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갖겠다,라고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말했어야 했다. 그게 기본적으로 돈을 내고 시간을 쪼개 강의를 들으러 온 수강생들에 대한 예의였다. 사실 PPT 10장 갖고도 3시간 진행하는 강사가 있고 100장 갖고 1시간 수업하는 사람이 있다는 담당자의 말에 내가 얼마나 얼어 있었고 말이 빨랐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한번 수업을 해보니 두 번째 수업은 PPT를 얼마큼 준비해야 하는지, 말의 속도는 어때야 하고 수강생들의 졸음을 달아나게 할 경험담과 농담은 어느 타이밍에서 어떤 걸 던져야 하는지도 조금씩 파악이 되었다. 다행히 두 번째 수업은 준비한 내용을 모두 채워 남는 시간 없이 알차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 수업에는 우황청심원도 마시지 않고 들어갔다. 내가 진행한 수업은 카피라이팅에 관한 거였는데 내가 실무자다 보니 내가 직접 작업한 사례들 위주로 풀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카피를 쓸 때 기본적인 이론에 대해서도 꽤 오랜만에 책을 들춰보며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가 완전히 소화해 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방송이나 강연에서 원고에 의존하지 않고도 말을 술술술 하는 데에는 그들이 그만큼 그 분야에서만큼은 모든 걸 다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수업이 월요일이다 보니 주말에도 맘 편히 쉴 수 없었다. 평일에 작업하지 못하니 주로 주말 밤을 이용해서 강의 준비를 했는데 그러자면 아이를 재워놓고 해야 되니 새벽 3, 4시는 기본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수험생처럼 자료를 들추고 사이트를 뒤지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꽤 많은 공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수강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PPT가 100장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들도 산 하나 넘는 계기가 되었길
마지막 수업 날은 (이날도 우황청심원을 먹지 않았고 심지어 전혀 떨리지 않았다) 더 많은 사례를 들어 카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내가 실제로 영향을 받은 일본 광고 카피 사례를 소개한 뒤 수강생들에게 직접 글을 써보는 시간을 주고 하나씩 다 읽어 본 후 내가 준비해 간 소정의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처음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이 마지막까지 빠지지 않고 수업에 참여해준 것도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수업 종료 10여분을 남겨놓고 전문 강사가 아니라 말도 더듬거렸는데 잘 들어줘서 고맙다, 내가 더 배운 게 많았다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할 땐 나도 모르게 울컥하기도 했다. 몇몇 수강생들은 남아서 일일이 명함을 교환하고 실무자가 하는 수업이라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해주어 마음이 벅차기까지 했다. 어제는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한 명이 직접 메일을 보내왔는데, 사회초년생이라 글쓰기가 어려워 듣게 되었는데 실제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진심이 우러난 그의 편지를 보며 주책 맞게 코끝이 싸해지기도 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하기 싫다고 속으로 울부짖으며(매여사에도 한두 차례 글로 남겼다) 수업을 준비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까지 가는 동안 마지막 남은 수강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그중에 한 이야기가 요즘 직장인들 참 힘겹게 사는 것 같다, 안 그래도 힘든 월요일인데 퇴근하고 와서 3시간짜리 수업을 듣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으려고 하는 그들의 자세에 나까지 숙연해졌다. 나도 그렇지만 요즘 직장인들 참 열심히 산다. 그렇게 하기 싫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지나고 보니 나 또한 또 하나의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고 내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에게도 어려운 산 하나를 넘는 계기가 되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