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만나기 전에는 분명 어색할 거라 생각했지만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예나는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 같았다. 예나가 원래 이렇게 밝은 성격이었나 싶었지만 딱히 어색하지 않은 것도 의외였다. 먼저 만나자고 한 건 예나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동창을 채팅을 통해 만난다는 이야길 자주 듣긴 했지만 직접 해볼 생각은 없었던 나였다. 갑자기 오후 일정이 취소된 어느 날 딱히 할 게 없어서 예의 그 사이트에 접속해 보았다. 내 편지함에는 예나가 보낸 쪽지가 있었다.
“넌 어쩜 그대로네?”
“그렇다고들 해. 난 잘 모르겠어.”
“정말이야. 6학년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어. 몸만 커버린 것 같아.”
예나는 나를 보자마자 옛날 얼굴 그대로라며 깔깔깔 웃었다. 예나는 진짜 내가 답장을 보낼 줄은 몰랐다며 우리의 만남이 좀 믿어지지 않는다는 투였다. 나도 딱히 예나의 지금이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만나서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다. 내 기억으로는 예나가 날 좋아했으니까.
“내가 너 좋아했던 건 기억해?”
“어… 어, 기억하지.”
난 좀 어색한 손동작으로 뒷머릴 긁적였다. 6학년 밸런타인데이였다. 예나는 시끌벅적한 아이들 틈에서 나를 교실 밖으로 불러내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그때 네가 나한테 수영이 좋아한다고 고백했잖아. 다시 생각해도 너무했던 거 아니니? 자길 좋아한다고 고백한 여자애한테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를 알려주는 거. 그것도 하필 나랑 제일 친한 친구를.”
예나는 맥주를 마셨고 나는 소주를 마셨다. 우린 옛날이야기를 하며 기분 좋게 취해갔다. 그때와 달리 부드러운 곡선으로 쌍꺼풀이 생긴 예나의 눈은 예뻐 보였다. 술에 취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정말 예나가 많이 달라진 건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술을 마신 우리는 정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그만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예나가 잠깐만, 이라고 말하며 작은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냈다. 얼핏 보기엔 립스틱 같았는데 립스틱은 아니었다. 7분 정도 휴대폰을 보고 있자니 예나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건 뭐야?”
궁금해진 내가 예나가 들고나갔다 온 것에 대해 물었다.
“아, 이거 칫솔. 전동칫솔.”
전동칫솔? 립스틱처럼 생긴 게 칫솔이라고?
“나 아직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우리 엄마가 술 마시는 거 되게 싫어하시거든.”
그러고 보니 예나의 어머니 직업이 목사였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술 마신 다음엔 꼭 양치하고 들어가. 전동 칫솔인데 립스틱처럼 작아서 쓰기 좋더라고. 보통 이런 칫솔은 일반 칫솔인데 말이야. 여기 이렇게 회전식 스위치라서 손톱 긴 여자들도 버튼 누르기 편해. 아무래도 타깃이 딱 여자야. 음파 진동이라 그냥 칫솔질보다 개운하게 닦이고. 건전지 한 개면 3개월 정도 쓸 수 있고…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너한테 칫솔 파는 것 같다. 하하”
“진짜 좋은 모양이네.”
“응. 최근에 산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이제 일어날까?”
예나는 본인이 먼저 만나자고 했으니 술값은 자기가 낸다며 굳이 계산서를 빼앗아 갔다. 술집을 나온 우리 두 사람은 지하철역까지 좀 걷기로 했다. 선선해진 가을바람이 부드럽게 볼에 닿았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넘긴 예나의 옆얼굴은 청아했다.
“그때 너희 두 사람 사귀었니?”
“수영이랑 나?”
예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수영이가 싫다고 했어.”
“왜?”
“네가 날 좋아하고 있어서 사귈 수 없데. 우린 베스트 프렌드니까 그러면 안 된다나.”
내 대답을 듣던 예나가 “귀엽네, 김수영.”이라며 웃었다.
“근데 그거 알아? 나 수영이한테 너 좋아하는 거 말한 적 없어.”
“정말?”
“바보야. 그런 건 말로 안 해도 알 수 있는 거야. 네가 둔해서 그런 거지.”
말을 끝낸 예나는 걸음을 재촉해 조금 빨리 걸었다. “지난 일이지, 지난 일”이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다음에는 수영이랑 셋이 같이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대답했고 예나는 상쾌한 바람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처음으로 오늘 예나를 만난 건 잘한 일이란 생각이 스쳤다.
끝.
<립스틱형 전동칫솔 편>
*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