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다음 날이 토요일이니까 괜찮을 거라는 판단은 오판이었다. 석 달만의 만남이었고 초판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탓일까? 나는 금방 지쳤고 인스타그램으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그녀들의 요즘 사는 이야기는 지루하고 졸렸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 침대 위에 뿅, 하고 누웠으면 좋겠다는 상상은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됐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그만 가야겠다. 금요일이라 택시 잡기도 힘들 텐데.”
혜영, 민희, 지수는 하나같이 휴대폰을 켜 시각을 확인했다. 다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다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우리 자주 좀 보자. 석 달에 한 번은 심했어.”
지수가 말했다. 낮과 달리 스산해진 새벽 공기에 우리들은 몸을 한껏 움츠린 채 그러자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호출했고 1, 2분 간격으로 차가 도착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연락할게!”
내가 부른 택시가 가장 먼저 도착해 나는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그녀들을 향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가급적 택시는 타고 싶지 않았다.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난폭한 택시기사의 운전 실력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집에 빨리 도착하는 건 좋았지만 택시 멀미는 매번 경험하고 싶지 않은 증상 중 하나다. 온종일 신고 다녔던 8센티미터 구두에서 내려오자 온몸이 와르르하고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낮에 있었던 프레젠테이션의 긴장 풀림과 오래간만에 만난 그녀들과의 만남에 대한 부담 해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평소대로라면 세수 정도는 하고 잤을 텐데 나는 잠깐 소파에 기대앉은 사이 잠이 들어버렸다.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은 창으로 눈부신 햇살이 왈칵 쏟아졌다. 시각은 어느새 11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창문을 꼭꼭 닫은 채 빛만 과다하게 들어와서인지 온몸은 땀으로 끈적였다.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잠들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그대로 서랍장에서 속옷을 챙겨 휴대폰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속옷을 수납장에 넣어두고 스마트폰으로 자주 듣는 팟캐스트에 연결했다. 익숙한 목소리의 두 작가가 최근에 읽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칫솔질을 마치고 옷을 다 벗은 뒤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초반엔 찬물이 나오기 때문에 왼손으로 물을 만지며 온도를 맞추려 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뜨거운 물이 섞여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스마트폰으로 마이크로봇을 켜 거실에 있는 보일러의 스위치를 누르게 했다. 저 아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뿌듯함. 아, 이럴 때를 대비해 설치해 두었지. 나도 모르게 훗, 하고 미소가 흘렀다.
겨울에는 늘 보일러를 켜두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여름엔 샤워할 때만 보일러를 켜다 보니 이런 경우가 종종 생겼다. 옷을 다 벗었는데 보일러 스위치를 누르기 위해 다시 거실을 가로질러 가려면 혼자 있더라도 옷을 다시 챙겨 입거나 수건을 둘둘 말고 나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으면 맞은편 아파트에서 우리 집 거실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알게 된 마이크로봇 푸시는 나 대신 버튼을 꾹 눌러주니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처음엔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싶었지만 이후에도 종종 이런 경우가 생겨 그제야 역시 설치 해두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건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혜영, 지수, 민희에게도 말해줬더니 그녀들 각자가, 빈집에 형광등을 켜거나, 커피 메이커의 전원 스위치를 누르거나 에어컨을 켜는 등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하나같이 나처럼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구 하나 ‘보일러 좀 켜줘’ 하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들은 만나면 늘 이런 주제를 가지고 속상함을 토로하지만 같이 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게 아닌 것이다.
‘오늘 아침은 그가 만들어준 향기로운 커피로 하루를 시작’
머그잔에 담긴 새카만 블랙커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사진에 민희가 쓴 한 줄 멘트를 읽고 나머지 우리 셋은 의미심장한 하트를 눌렀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닌 ‘손가락 로봇’이라는 걸 굳이 발설하지 않는 의리도 잃지 않았다.
끝.
<마이크로봇 푸시 편>
*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