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주변은 맑음

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by 이유미

직장을 관둔 뒤 직장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사거리 스타벅스에서 A를 처음 보았다. 서른여덟에 다니던 회사를 관둔 나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으로 마음껏 쉴 수 있는 날은 열흘이면 충분했다.




직장을 관둔 뒤 직장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사거리 스타벅스에서 A를 처음 보았다. 서른여덟에 다니던 회사를 관둔 나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으로 마음껏 쉴 수 있는 날은 열흘이면 충분했다. 더는 내가 견딜 수 없어 이불을 박차고 집을 뛰쳐나왔다. 일단은 노트북과 소설책 한 권은 무조건 챙겼다. 하루 4~5시간 있을 작정으로 간 그곳에서 노트북과 책 없이 버티기란 힘들다는 걸 아니까. 사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당분간은 퇴직금이란 비빌 언덕이 있었다. 오전 10시에 카페라테를 한 잔 주문해서 마시고 오후 1시에 점심으로 먹을 햄 치즈 토스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옆자리에는 A가 노트북을 펼치며 뭔가를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창가 자리가 아닌 혼자 있을 수 있는 테이블로 옮길까 고민했지만 자신이 앉자마자 옆 사람이 자릴 이동한다면 A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그대로 있기로 했다. 쓸데없는 오지랖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싫었다. 치즈가 적당히 녹은 토스트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빵보단 밥이 좋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반쪽을 다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고 있을 때 A가 뭔가를 꺼내 노트북에 끼웠다. IT 기기에 대해선 모르는 게 거의 없는 나로선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그 물건을 노트북에 연결한 A는 그대로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저건 과연 어떤 기능을 하는 물건일까 혼자 고민에 빠진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뭐 필요하세요?”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인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몸의 반 이상이 그녀 쪽으로 기울어진 다음이었다.

“아, 아닙니다.”


당황하는 나를 뒤로하고 A는 고개를 한번 끄덕하더니 다시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망해진 나는 남은 토스트 반쪽을 입에 욱여넣으며 창가를 바라봤다. 날씨가 다할 것 같은 날이었다. 이런 날 취직 문제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그날 이후 나는 스타벅스에서 종종 A를 봤다. 네 번째 마주치던 날에는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 가벼운 목례를 하기도 했는데 A 또한 인사를 받아 옅은 미소를 날리기도 했다. 그녀는 날마다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프리랜서 작가… 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턱대고 물어볼 순 없는 일이었다.


“저기…”

그때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나에게 A가 말을 걸어왔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노트북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노트북요?”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요 앞 은행에 다녀와야 해서요. 금방 끝나는 일이라, 다 챙겨가기도 뭐 하고….”

“그러세요. 제가 맡아 드릴게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그렇게 나는 A의 노트북과 자리를 지켜 주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의 노트북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물건이 연결돼 있었다. 그렇다면 기왕 이렇게 된 거 돌아오면 물어보자 생각한 나는 괜히 홀가분한 심정이었다.

A는 정확히 15분 뒤에 돌아왔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날씨만큼 환한 미소를 날리며 고맙다고 말하는 A에게 물었다.


“근데 이건 뭐 하는 거예요?”

“이거요? 공기 청정기예요. 미니 공기청정기요. 제가 주변 공기에 좀 예민한 편이라서…”

“이게 가능한가요?”

“네, 제 주변만 공기 정화되는 거예요. 작아도 꽤 알차요. 제가 알기론 한 평 반을 기준으로 이산화탄소랑 휘발성 유기화합물 같은 게 줄어든다고 하더라고요. 음 그러니까 휘발성 유기화합물은 악취 같은 걸 말하는데 벤젠이나 포름알데히드, 그런 거요.”

“신기하네요. 이렇게 작은데 공기 정화가 된다니…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지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여기 이 안에는 초미세먼지 제거용 필터인데 여기 미네랄 하고 효소 같은 미생물을 포함한 최상질 황토가 들어있데요. 6개월 정도 쓸 수 있고 주기적으로 필터를 청소하면 3년은 쓸 수 있어요. 저는 올봄에 미세먼지 때문에 샀거든요.”

“세상에는 좋은 게 너무 많아요. 내가 몰라서 그렇지. 알아야 이런 것도 누리는 건데요. 그렇죠?”

A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근데 무슨 일 하세요?”

“저요? 드라마 작가 준비생이에요.”

역시 내 예상대로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있어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한 번 신세 졌으니 다음엔 제가 자리 봐드릴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신세를 졌으니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고 싶었지만 A는 그럴 마음까진 아니었나 보다. 살짝 실망했지만 앞으로 기회는 더 많을 테니 여유를 좀 갖자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나저나 여길 오면 유독 산뜻한 기분이 드는 건 그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 작은 공기청정기 때문이었을까?



끝.


<USB 미니 공기청정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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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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