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못한 일

설명서 대신 읽는 소설

by 이유미

너무나 드라마 같은 상황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라마 같은 일은 별게 아니었구나. 그냥 우리가 사는 모습이 드라마구나. 나는 또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했단 생각에 K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퇴근 무렵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라 모두들 당황하며 편의점으로 우산을 사러 가네, 이렇게 된 거 회사 근처에서 술이나 마시자는 둥 갖가지 의견이 쏟아졌다. 다행히 차를 가져온 나는 그들 틈을 조용히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3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기대섰다. 그제야 그날의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주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도착을 알리는 띵동 소리에 눈을 뜨고 기댔던 허리를 뗐다. 그때 천천히 문이 열리고 K가 탔다. 거긴 지하 3층이 아니라 그냥 3층이었다.


“퇴근하세요?”

“네.”

“비가 엄청 쏟아지네요……”

“우산 있어요?”

순간 나는 K가 사는 오피스텔이 우리 집과 같은 방향이란 걸 떠올렸다.


“아뇨. 일단 밖으로 나가서 편의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전혀 예상 못했거든요.”

“그럼 제 차 타고 가세요.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요. 가다가 내려드릴게요.”


K는 살짝 미안한 기색이더니 곧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그럼 신세 좀 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내 빨간색 아반떼에 나란히 탔다. 다행히 지난 주말 세차를 해서 안심이었다. 몇 달째 안 하다가 이상하게 세차하고 싶더라니… K에게 주저 없이 차를 태워주겠단 말을 꺼낸 자신에게 놀란 나는 두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K 몰래 달래며 차를 출발시켰다. 비가 이런 식으로 나를 도와주게 될 줄은 일기예보만큼이나 예상 못했다.




“그러지 말고 저녁 식사하고 가세요.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 먹을 거 아녜요.”

“정말 그래도 돼요? 에이, 저 정말 그냥 가도 되는데…”

“저도 혼자 먹기 싫어서 그래요. 내리세요. 비도 오는데, 어묵 탕 금방 끓일 수 있어요.”


일이 이런 식으로 급진전될 줄 몰랐던 터라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흔치 않은 기회를 쉽게 놓칠 순 없었다. 나는 마지못한다는 듯 차를 주차시키고 K를 따라 그의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K는 최근 이사했다. K의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최 대리가 집들이에 다녀왔다는 이야길 해줬던 게 기억났다. 결벽증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던 최 대리 말마따나 그의 집은 정말 심플하고 깔끔했다. 모든 곳에서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일주일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고 이 주에 한 번 걸레질하는 우리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예요. 너무 깔끔하다고 부담 갖지 마세요.”

속마음을 들킨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작은 침실이 달린 그의 오피스텔은 남자 혼자 살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다. 아니 어쩌면 둘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TV 보면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돼요.”


K는 가방과 재킷을 소파 위에 휙 던져 놓고 바로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어묵과 무, 파 등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아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자질구레한 소품이 없고 딱 있을 것만 있었지만 모두 값이 제법 나가는 것들뿐이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주방으로 이어지는 벽에 걸린 물건이었다. 아무리 봐도 용도를 한 번에 알 수 없어 궁금해진 나는 어색함도 달랠 겸 K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저건 뭐예요?”

“아, 그거요? 소화기예요. 처음 봤죠?”


K는 여느 남자와 달리 뭐든 예뻐야 산다는 최 대리의 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남자는 정말 하나를 사도 아무거나 사질 않는구나.


“보통은 현관 바닥 같은데 놓여 있는데, 이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 수 있는 벽걸이 형 소화기예요. 분말형이 아니라 강화액이라 소화력도 뛰어나고 불 끌 때 시야를 안 가려요. 불을 끈 다음엔 물로 씻어낼 수 있고요.”

K는 파를 씻다 말고 손의 물기를 탈탈 털더니 나에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나는 그에게 다가섰다.


“여기 이 빨간색 안전핀을 뽑고 녹색 표시를 향해 잠금장치를 풀어줘요. 그다음 그대로 불이 난 곳에 분사하면 끝! 일반 소화기와 달리 분사하기 전에 흔들지 않아도 되고 무겁지 않아서 아이들이나 노인도 쉽게 쓸 수 있어요. 혹시 집에 소화기 있어요?”

“아… 아뇨.”

“그럼 제가 나중에 하나 선물할게요.”


그가 얼마나 가벼운지 한번 들어보라며 내 손에 소화기를 쥐여주는 순간 우리의 손이 제대로 스쳤다. 내 가슴은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고 귀까지 빨개지며 몸이 화끈거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가 손에 들려준 소화기로 내 마음의 불도 끌 수 있다면 좋겠단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끝.


<가정용 소화기 편>

소설 속 상품이 궁금하다면 클릭!



*매뉴얼 노블은 어려운 설명서를 잘 읽지 못하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연재물입니다.

어려운 설명서, 복잡한 구매 후기 읽기보다 짧은 소설 한 편으로 제품이 이해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29CM 앱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그녀 주변은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