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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06. 2018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어머니는 욕조에 물을 채워놓았다. 수도가 언제 끊길지 몰라서였다. 그러다 장마가 지속되자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대부분의 그릇에 수돗물을 받아놨다. 커다란 고무 대야는 물론이고 세숫대야와 주전자, 물통 및 여러 가지 색깔과 형태의 유리잔에까지…

<김애란 ‘물속 골리앗’을 읽다가>




대학교 전공도 입시 미술학원에서 정해준대로 다녔던 나는 졸업 후 미술학원에서 오랜 기간 강사 일을 했다. 별다른 조건도 필요 없이 그저 미술 관련 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합격한 첫 직장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딱히 도전 정신이나 자기계발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늘 누렇게 때가 낀 욕조에 고인 물 같았다. (그대로 계속 있었다면 썩은 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딱히 벗어나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던 건 심신이 별로 힘들지 않은 일과 고정 수입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중학교 동창을 오랜만에 만났다. 안 본 사이 그녀는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 중 하나인 N사에 합격해 다니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녀의 연봉을 듣고 (물론 연봉 갖고 모든 걸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굉장히 잘못 살고 있단 판단이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네가 하는 일이 뭐라고?”


친구는 사이트 웹 디자이너라고 했다. 웹 디자이너와 편집디자이너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파악하지 않은 채 무작정 포트폴리오 학원에 등록했다. 다니던 직장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모르면 몰랐을까 알고 난 이상 나는 그 일을 해야겠단 확신이 들었다. 직장을 관두고 3개월 동안 나오는 실업급여로 근근이 버티며 포트폴리오 학원에 다녔다. 학원이라고 했지만 사실 과외나 다름없었다. 일주일 동안 작업한 과제를 가지고 수요일 딱 한 번 선생님을 1:1로 만나는 시스템. 작업실은 신촌에 위치한, 책상 두어 개 놓으면 꽉 차는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그 좁고 어두운 곳에 들어갈 때면 오늘 무슨 일 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일주일에 한 번 숙제 검사를 받았지만 과제 양이 어마어마해서 일주일 내내 홀로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당시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굉장한 스파르타 식이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선생님한테 혼나서 운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말 눈물 쏙 빼게 혼내서 이를 득득 갈았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냥 이만 갈았다면 치과비가 만만치 않았겠지만 이는 적당히 갈고 오기가 생겼다. 칭찬받고 싶었다. 칭찬이 무섭긴 무서웠다. 자존심 건드리는 소리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선생한테 잘했단 말 듣는 게 절실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잘 나가는 포트폴리오 과외 선생님의 노하우가 아니었나 싶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뭔가에 몰두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친구의 연봉이 내 삶의 굉장한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다.


터닝 포인트가 된 친구의 연봉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동안은 당연히 수입이 없으니 백수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언니와 형부 그리고 4살 조카와 엄마가 함께 살았다. 언니 부부는 맞벌이였고 엄마가 당시 조카를 돌봐주었다. 나는 집에 있는 백수라고 해도 조카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는 이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제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내 방에서 거의 나갈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시험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밤을 새웠을까? 그래도 날마다 원하는 목적지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단 생각에 작업이 재미있고 설렜다. 나는 밤과 새벽에 작업하는 걸 좋아했다. 모두 잠든 시간에 라디오를 켜놓고 음악과 사연을 들으며 손으로는 열심히 그래픽 작업을 했다. 수입이 없었고 모아 놓은 돈도 없어서 생활비를 낼 수 없는 형편이라 슬슬 형부와 언니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애라도 열심히 봐주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텐데 그땐 또 그러지도 못했다. 발 디딜 틈 없는 골방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과제에 몰두했다. 엄마가 밥 차려놨다고 소리치면 나가서 밥 먹고 방에 다시 들어오는 식이었다.

illust by 이영채


하루는 매일 듣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다. 내용인즉 백수다 보니 집안 식구들 눈치가 보인다는 거였다. 구체적으로 언니보다 형부의 눈치가 보인다,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 더 다가가기 힘들다, 라는 내용이었다. 뽑힐 거라는 기대보다 답답한 마음에 썼던 넋두리에 가까웠는데 당시 디제이였던 남궁연이 내 글을 읽는 게 아닌가? 그날도 열심히 딸각딸각 마우스질을 하다가 익숙한 내용을 듣고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모두 자는 시간이라 누구한테 내 사연이 라디오에 나왔다고 자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 혼자 신기해하며 듣고 있었다. 내가 보낸 고민에 대한 디제이의 해결안은 “눈치가 보이면 보일수록 안으로 숨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는 거였다. 눈칫밥 먹는 티는 내지 말고 밝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먼저 나서서 말을 걸고 인사하라, 이렇게.


“형부 다녀오셨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말이 쉽지 너무 어색해서 이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나는 딱 한 번인가 그가 시키는 대로 해봤지만 효과는 그리 탁월하지 않았다. (오늘 쟤가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이었음) 그때 내 사연을 읽어준 디제이가 위로 차원에서 틀어준 노래가 송대관의 ‘해뜰날’이었다. 새벽 2시에 그린데이나, 린킨파크, 콜드플레이 등 주로 락밴드의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례적으로 트로트를 틀어준 것이다.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나에게도 언젠가 해뜰날이 올 거라면서… 정말이지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났다.


노랫말처럼 찾아온
 내 인생의 해뜰날


당시를 추억하니 격하게 서러웠던 일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이 내용을 장황하게 늘여서 라디오 사연으로 보냈다) 한 번은 언니와 나 그리고 엄마 셋이서 대중목욕탕에 갔다. 줄곧 세산사에게 몸을 맡겼던 나는 백수가 된 다음부턴 단돈 천 원이 아쉬웠기 때문에 스스로 때를 밀수 밖에 없었는데 엄마와 언니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세신사에게 때를 밀며 둘 중 누구 하나 세신 비용을 대신 내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몸 자기가 때 미는데 서럽고 말고 가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퍼 담은 밥 양이 적으면 괜히 서러워지는 나였으니까. 티 내진 못했지만 너무 서러운 나머지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사우나에 잠입하기도 했다.

이듬해에 네모 반듯하게 만든 포트폴리오를 들고 면접에 합격! 당당히 원하던 직장에 입사했고 드디어 나에게도 해뜰날이 왔다. 그곳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휴대폰을 바꿨다. 무거워서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던 싸구려 코트를 벗어던지고 백화점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가격) 45만 원 주고 가벼운 울코트를 사 입었다. 당연히 때도 세신사에게 밀었다. 여기에 다 적지 못하지만 안팎으로 서러운 일들 꾹꾹 참으며 버텼더니 정말 가사처럼 되었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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