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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13. 2018

어떤 개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찬성이 그 개를 처음 본 건 아버지를 여의고 한 달 즈음 지나서였다. 찬성은 고속도로 휴게소 공중 화장실 근처에서 그 개를 봤다. 개는 남자 화장실 옆 화단의 철제 울타리에 묶여 있었다. 여러 피가 섞여 정확히 어떤 종이라 말하기 어려운 작고 흰 개였다.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을 읽다가>




어떤 개는 죽어서도 사람보다 오래 기억된다. 나는 그런 개를 안다. 그리고 키워봤다. 개가 사라진 지 16년이 흘렀어도 집안 곳곳엔 녀석의 사진이 있다. 서랍을 뒤져보면 더 나올 것이다. 여러 장의 사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뿌옇게 흐려진 한쪽 눈이 카메라 프레쉬에 반사되어 하얗게 날아간 사진이다. 늙어서 눈물이 많이 나 눈 밑 하얀 털은 붉은 갈색으로 변해 지저분해졌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솟구친다. 종은 몰티즈 성별은 여아, 우리가 지어준 이름은 쫑아였다. 중성화 수술은 하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에는 집에서 키우는 개의 중성화 수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다른 집은 모르겠고 우리 집은 그랬다. 그냥 생긴 대로, 태어난 대로 밥 주고 사랑 주며 키우면 그만인 줄 알았다. (먼 훗날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막대한 후회를 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밖에서 키우는 잡종도 아니고 몰티즈라는 순종 개를 키우게 된 계기는 엄마의 지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개를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강아지를 받으러 가자고 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초여름이 시작되려는 5월, 엄마 차를 타고 쫑아를 보러 가던 길. 심장이 두근거려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그때가.


어떤 개는 죽어서도
사람보다 오래 기억된다


우리가 쫑아를 데려왔을 땐 태어난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유독 작은 몸이 가벼웠다. 1년이 지났으니 새끼도 아닐 텐데 한 손으로 들기에도 가뿐했다. 워낙 몸집이 작았다. (훗날 쫑아는 이 작은 몸집 때문에 새끼를 베지 못한다.) 엄마, 언니, 나 이렇게 셋뿐이던 집에 식구가 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 집은 쭉 개를 키워왔다. 아빠 엄마 모두 개를 좋아해서 이웃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 하면 한두 마리 얻어오기도 하고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아서 다른 집에 나눠주기도 했다. 늘 똥개라 불리는 잡종만 키우다가 순종 몰티즈를 키우게 된 우리는 묘한 신분 상승 기분마저 들었다. 산책을 나가거나 개를 한쪽 팔에 안고 마트라도 가면 알 수 없는 우쭐함을 느꼈다. 개로 인한 우쭐함이라니. 순종인 개를 키우려면 돈이 든다. 털이 길고 곱슬거려 자주 엉키기 때문에 미용도 수시로 해줘야 하고 치석 제거도 해줘야 한다. 사료 값도 만만치 않고 때마다 예방접종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린 개에 이만큼을 다 투자할 만큼 좋은 형편이 아니었다. 개는 개답게(?) 키울 수밖에 없었다. 넘칠 만큼 줄 수 있는 건 사랑과 관심뿐이었다. 허기사 개를 키우면서 관심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그런 면에서 쫑아에게 다양한 혜택을 줄 수 없었지만 세 식구가 쫑아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illust by 이영채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언니는 중학생이었다. 개의 모든 관리는 엄마가 도맡아 해야 했다. 엄마는 애견샵에 데려가지 않고 직접 가위를 들고 털을 깎아줬다.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가 좁은 마당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쫑아를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은 다음 털을 잘라주고 나면 녀석의 몸에 군데군데 상처가 생겼다. 연고를 발라주며 피딱지가 아물 때쯤 엄마는 다시 가위를 들었다. 털이 엉키기 시작하면 답답한 건 개였지만 보는 우리도 갑갑했다. 애견샵에서 제대로 미용을 해줬더라면 훨씬 더 예뻤겠지만 손재주 없는 엄마가 대충 잘라도 쫑아의 미모는 빛났다. 대소변 훈련은 잘 돼있어서 반드시 욕실에 들어가 볼일을 봤고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은 주먹처럼 동그랗게 말은 양말이었다. 새것이 아닌 꼬릿 꼬릿 한 냄새나는 걸 더 좋아했다. 그걸 거실 끝에서 주방 끝으로 힘차게 던져주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 입으로 물고 돌아와 다시 내 앞에 놔주었다. 그러면 다시 던지고 또 주워오고. 그게 유일한 운동이기도 했다.


쫑아는 사료를 먹지 않았다. 이건 애초에 전 주인이 길을 잘못 들인 탓이었다. 녀석의 주 식사는 햄이었다. 김밥 쌀 때 쓰는 벽돌처럼 생긴 커다란 햄을 새끼손톱만 하게 작게 썰어주었다. 몇 번인가 사료를 먹여보려 시도했지만 굶으면 굶었지 이건 못 먹겠다, 는 자세여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쫑아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평생을 햄만 먹고살았는데 건강하면 이상한 거지. 까맣고 기름지던 코가 연한 핑크빛으로 변한 15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던 쫑아는 언니가 스물여섯 결혼하던 해에 다시는 뜨지 못할 눈을 감았다. 중성화 수술을 하지 않고 새끼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유방암에 걸린 녀석은 막판 몇 달을 거의 누워만 지냈다. 한쪽 눈은 실명이 되었고 갈수록 허약해지더니 암까지 걸린 것이다.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갔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 수술을 한다고 해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는 행복한 개야
우린 아직도 널 그리워하니까


개에게 한 평생인 15년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중학생이었던 여자 아이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는 동안 함께 살아온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 가족은 밤이 새도록 아니 몇 날 며칠을 울다 지쳐 잠들곤 했다. 유난히 똑똑했던 쫑아는 마치 사람처럼 말귀를 알아듣고 때론 우리를 위로했다. 녀석과 함께한 시간들이 우리 가족에게 그리 행복하기만 한 때는 아니었기에 때로는 말 못 하는 한낯 짐승인 개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사람이 키우는 모든 개가 주인에게 이토록 강렬하게 기억되진 않는다. 유독 정이 많이 갔던 특별히 맘이 쓰였던 개가 있기 마련이다. 친정에 가면 거실 수납장 옆에는 아직도 손바닥만 한 액자에 끼워진 쫑아의 사진이 나를 맞는다. 나는 가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녀석에게 말을 건다.

“쫑아야, 너는 참 행복한 개야. 시간이 이렇게 흘러도 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엄마는 쫑아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절대 개를 키우지 않는다. (요즘 엄마는 작은 어항에 금붕어 네 마리를 키운다) 홀로 지내는 일상이 외로울 법도 하지만 그때 녀석을 떠나보낸 후유증이 너무 컸다. 나는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들과 함께 고양이를 키우고 언니는 개를 키우고 싶어 하지만 아들 녀석이 털 알레르기가 있어 깨끗이 단념했다.


남자 친구와 싸우고 돌아온 늦은 밤. 회사에서 엄청 깨지고 돌아온 날. 말없이 꼬리 흔들며 나를 반기는 건 쫑아뿐이었다. 밤늦게 들어 가도 귀를 쫑긋 세우며 기다렸다가 작은 몸이 사라질세라 꼬리를 흔들어대며 현관에서 나를 맞이하던 작은 개. 한때는 꿈에서라도 녀석을 한 번만 다시 안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는 작은 몸을,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고. 그만큼 절실하게 그리웠다. 어떤 개는 잊히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보고 싶은 마음만 커져간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개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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