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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는 여자의 오늘사는 이야기
by 이유미 Sep 06. 2018

늦은 시작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언제부턴가 ‘스케치북’을 잘 안 보게 되었다. 참 오래된 그 프로그램은 가수 이소라 진행으로 시작해 현재는 유희열이 MC다. 매주 금요일 12시 반에 시작하는 이 프로그램을 왜 안 보기 시작했나 했더니, 사실 텔레비전 자체를 보기가 힘들다. 본방송을 보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보니 굳이 스케치북을 다시보기로 볼 일은 없었나 보다. 다시보기 하는 경우는 대부분 예능 아니면 드라마다. 그마저도 요즘은 딱히 챙겨보는 드라마가 없어 <나 혼자 산다> <밥블레스유> 정도가 내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의 전부다. 


그렇게 잘 안 보던 프로그램을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날이 아마 스케치북 400회 특집이었는데 방청객이 사전에 나눠준 포스트잇에 짧은 문구를 적어 내고 그걸 골라서 이야기 나누는 거였는데, 본인을 취업 준비생이라 밝힌 한 남자의 메모가 인상적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나와 같다. 너무 늦게 시작한다.


무심결에 채널을 돌리다 멈춰버린 나를 비롯 진행자와 게스트 또한 그 메시지 하나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스케치북이 늦게 시작하는 건 맞는데 그게 왜 본인과 같으냐는 질문에 저 뒤에 방청석에서 우뚝 선채 마이크를 잡은 그(메시지를 적은 당사자)가 늦은 나이에 취업을 준비하려니 좀 힘들다, 라는 말을 꺼냈다. 

늦은 때. 늦은 시작. 늦는다는 건 불안하다. 뒤처지는 것 같고 끝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다. 나는 늘 제때를 당연시해왔다. 제때 학교를 졸업했고 남들 취업할 때 취업했으며 살짝 늦었나 싶기도 하지만 결혼도 출산도 거의 제 시기에 했다. 그 누구보다 늦춰진다는 걸 못 견뎌왔기 때문에 휴학 한번 못했다. 두려웠다. 친구들은 제때 졸업하는데 혼자 학교를 다닌다고? 상상할 수 없었다. 백수 생활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마저도 취업과 취업 사이에 아주 잠깐이었기 때문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시간적 여유를 두지 않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농담처럼 그때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껏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때라는 것을 중요했던 나는 지금이 아니면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아서 덜컥 결혼했고 우물쭈물하다가 아이도 낳았다. 


요즘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우하는 사람 중에 자녀 둘을 대안학교에 보낸 이가 있는데 그녀의 삶을 보면 참 부럽고 대단해 보이면서 남들처럼 아이들을 제때 공부시키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이 없을까 라는 고민을 혼자 하곤 한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내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의 삶인데 말이다. 


얼마 전 친정엄마가 사촌동생(이모 딸)이 대학원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했다. 그 이야길 듣고 거의 반자동으로 “아니 걔는 취업은 언제 하려고 그래?”라는 말을 내뱉는 나를 보고 아, 나는 정말 시기에 민감한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늦어지면 어때서, 제때라는 게 어디 있다고. 다 자기 속도에 맞춰가면 되는 거지. 

취업은 언제 하려고 대학원을 갔냐는 내 말은 조금 더 공부하지 못하고 곧장 취업을 했던 내가 못 지냈던 시기에 대한 질투일지도 모른다.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자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모 딸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지 않아도,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받쳐줄 수 있는 부모의 재력이 내 것이 아니어서. 


취업에 자꾸 뒤처져 늦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제때 돌아볼 겨를 없이 취업해 버려서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 하나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순 없다. 우리는 그저 자기만의 속도가 옳다고 믿고 가면 된다. 그렇다면 그 취준생의 메모는 틀렸다. 


삶의 때란 프로그램 정규 시간처럼 정해질 수 없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늦게 시작하는 건 맞지만 당신의 시작은 결코 늦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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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29CM 직업에디터
현재 온라인 편집숍 29CM에서 온갖 글을 짓고 있다. 퇴근 후에는 글쓰기 모임과 카피라이팅 강의를 한다. 디자이너인 남편과 4살 아들, 털이 많이 빠지는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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