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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는 여자의 오늘사는 이야기
by 이유미 Oct 02. 2018

행복했고,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어떤 날의 글 

*암웨이 매거진 아마그램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줄기차게 읽어대는 여름이다. 소설을 한 권 끝내면 에세이로 넘어가고 좀 밋밋하다 싶으면 자기계발서를 읽고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다시 소설로 돌아온다. 출퇴근 이동 중에 읽던 책이 끝날 것을 대비해 가방에 책 한 권을 더 넣고 다니는 건 오래된 강박증 중 하나다. 날도 덥고 책장이 술술 넘어갈 책이 읽고 싶어 일본 미스터리 소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었다. 다소 황당한 면이 없진 않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긴박감이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음엔 뭘 읽을까 싶어 빼곡히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새 책이 있는가 하면 반쯤 읽다만 책도 수두룩하다. 나는 책도 맞는 때가 있다고 믿는데, 지금 재미없어 덮어둔 책이 반드시 흥미롭게 읽힌 날이 돌아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중에 박웅현이 쓴 ‘다시 책은 도끼다’가 내 레이더에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꽂이 가장 아래칸에 있는 그 책을 꺼냈다. 이전에 75페이지까지 읽었던 모양이다. 퇴근을 서두르며 가방에 책을 넣었다. 


1호선은 잘못 걸리면 냉방이 거의 되지 않는 걸 타게 된다. 빨리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나에게 냉방이 잘되는 전동차를 고를 여유가 없다. 일단 들어오는 열차를 재빨리 타야 한다. 그다음은 어쨌거나 도착하기 전까지 20여 분간 달콤한 독서시간이 주어지니까. 그렇게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까, 작가가 자주 인용한다는 영국에 있는 어떤 여자의 묘비명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 두 번 행복했던 여자가 누워 있다. 그녀는 행복했고,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뭔가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행복했고 그것을 안다는 게 두 번째 행복이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 두 번째를 못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충분히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기대한다. 아이가 말대답을 하고 자기주장이 세진다고 저 녀석 아기 때는 참 귀여웠는데, 하고 아쉬워한다. 과거로 채널을 돌려보면 분명 얼른 컸으면 하고 바랐을 텐데 말이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내가 그렇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진다. 그러면 휴대폰을 꺼내 그간 찍어둔 동영상이나 사진을 본다. 그런데 막상 집에서 아이를 돌볼 때면 조금만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낸다. 퇴근 후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방에 넣어 놓고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한다. 아이는 내 뒷모습을 보며 제 방 문에 걸어놓은 안전가드 잠금장치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빨리 설거지를 끝내려 한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아이를 보게 되었는데 왜 나는 그 아이를 혼자 두고 설거지에 여념이 없는 걸까. 나는 지금 아이와 함께 있어 행복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이가 없을 때 아이를 보고 싶어 하고 볼 수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 하다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27개월 아들의 저녁 7시를 설거지하느라 여념 없는 엄마의 뒷모습으로 남겨두려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퍼뜩 차려진다. 이까짓 설거지 지금 안 하면 어때서. 나는 거품 묻은 고무장갑을 빼고 아이 방으로 들어가 아들에게 뭐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이는 재빨리 장난감 통에서 공룡인형을 꺼내오며 “엄마 가치, 가치(같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지금 행복’한 놀이를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공룡 발톱을 흉내 내며 쿵쿵 소리를 내는 큰 걸음을 걸었다. 아이는 까르르 넘어갔다. 


나중이 아닌 지금 행복한 삶을 일컫는 욜로(YOLO)는 요즘 가장 핫한 단어다. 앞서 말한 영국 여자의 묘비명처럼 지금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아는 것 또한 욜로가 아닐까 싶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또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라고 했다. 사소하고 소박한 것들이 행복임을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잊고 지내는 것이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한참 동안 물놀이 겸 목욕을 시켜주니 찡얼 대지 않고 바로 잠든 아이를 눕혀 놓고 내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오늘 야근을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따듯한 저녁밥을 먹여줄 수 있었고, 아까 미처 마치지 못한 설거지는 남편이 뒤늦은 퇴근에서 돌아와 마무리해줬다. 그렇게 설거지 쌓아두고 있어도, 청소기를 3일째 돌리지 못했어도 잔소리하는 사람 하나 없다. 회사에서는 기획안에 딱 맞는 카피를 썼다고 인정을 받았다. 아이는 아프지 않았고 나와 남편도 건강했다. 오늘 나는 행복했고,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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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매일 읽는 여자의 오늘사는 이야기
소속29CM 직업에디터
현재 온라인 편집숍 29CM에서 온갖 글을 짓고 있다. 퇴근 후에는 글쓰기 모임과 카피라이팅 강의를 한다. 디자이너인 남편과 4살 아들, 털이 많이 빠지는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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