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글
*암웨이 매거진 아마그램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할 때도 우리 세 식구는 함께다. 그러니까 남편보다 약 한 시간 일찍 퇴근한 내가 아이를 친정 집에서 태워 집으로 가는 길 전철역에서 뒤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픽업한다. 역에서 집까지 차로 15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오늘의 2차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하루 중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에 이만한 공간과 시간도 드물다. 가끔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같은 걸 하며 잠시 깔깔거리기도 한다.
“여보, 약간 뚱뚱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어디게?”
운전대를 잡은 나를 향해 남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리며 물었다.
“퀴즈야?”
“응, 난센스.”
‘오호라, 올 것이 왔군. 말로만 듣던 그 아재 개그란 말이지.’ 속으로 생각한 나는 정답을 맞히고 싶어 재촉하지도 않는 남편에게 “잠깐, 잠깐! 기다려 맞출 수 있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맞추고 싶은 내 욕구와 달리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그 ‘아재 개그’의 정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아… 모르겠어. 뭐야?”
“반포동. 으하하하하”
아재 개그를 들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개그가 진짜 웃겨서 문제를 낸 사람과 동시에 배꼽을 잡고 낄낄거리며 웃던가 아니면 뭐 씹은 얼굴로 출제자를 째려보든가. 나는 전자였다. 반포동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답을 듣고 나는 그만 핸들을 팡팡 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여보, 나 아재 됐나 봐. 요즘 이런 게 너무 좋아.”
“그러게. 나도 너무 웃기네. 우리가 늙긴 늙었나 보다.”
웃음 뒤에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나지만 그래도 계속 그 ‘반포동’만 생각하면 웃겨서 설거지를 하다가도 피식피식 웃게 됐다.
한동안 꽃중년이란 말이 이슈 더니 요즘은 ‘아재 파탈’이란 신조어가 뜨겁다. 멋진 중년을 뜻하던 꽃중년에 아저씨들만의 감성이 입혀져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진다는 ‘아재 파탈’이 된 것. 어찌 보면 아재와 한 끗 차이인 ‘꼰대’라는 단어는 나이 든 사람들이 과거 운운하는 것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였지만 요즘 이 아재라는 친근한 표현은 괜히 따뜻하기까지 하다. 회사에서 직급이 아래인 직원들에게 “나 때는 말이야”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알 거다” “요즘은 진짜 편해졌지”같은 말을 하면 꼰대다. 아재는 그와 달리 소통과 공감이 기본이다. 변화를 모르는 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며 구석에서 지켜보는 게 아닌 함께 행동한다. 가르치려 들기보다 공감과 이해가 우선이다. 그들은 젊은 세대가 호응할만한 패션 감각은 물론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철저한 자기관리 그리고 2, 30대에선 쉽사리 부각될 수 없는 경제력까지 더해져 치명적 매력을 뽐내기도 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재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의 에세이를 읽어 보면 아재만이 줄 수 있는 묘한 매력을 담뿍 느낄 수 있는데, 에세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의 이런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남한테 충고하는 일은 거의 없다. 원래 ‘되도록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기’를 방침으로 살아가는 탓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지금까지 내가 뭔가 조언해서 좋은 결과를 초래한 예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세상 사람 대부분은 실용적인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맞장구를 원하는 게 아닐까? (중략) 그러니 나로서는 되도록 예쁜 방석을 준비해두고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_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126p)
하루키 본인은 자신이 어떤 조언을 해 봤자 잘 해결된 결과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일상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기보다 잘하는 건 잘한다고 인정하고 다독여줄 수 있는 여유와 진심이 담긴 쿨한 아재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아재 개그의 매력에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다. 약간 뚱뚱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반포동을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