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미 Oct 16. 2018

느림을 꺼낸 여행

어떤 날의 글 

*암웨이 매거진 아마그램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그래서 종영된 '윤식당' 이야기가 나와요) 


금요일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연달아 볼 수 있어 늘 기다려진다. TVN에서 하는 금토 드라마를 보고 ‘윤식당’을 본 뒤 MBC로 넘어와 ‘나 혼자 산다’를 시청한다. 그중 윤식당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PD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멀리 발리 외딴섬에 가서 작은 식당을 차려 한국 음식을 판다는 내용이다. 보고 있노라면 참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닌 이 프로그램을 일주일 내내 기다리기도 한다. 메인 요리는 불고기, 그 외에 라면이나 만두 때로는 치킨을 튀겨 팔기도 하는 이 식당엔 아름다운 섬을 찾아온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매회 등장한다. 2주 전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참 희한한 장면을 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대한 반응. 여자 둘에 남자 둘이 온 이 무리들은 각종 불고기 요리(라이스, 버거, 누들)를 종류별로 주문했다. 음식을 거의 한 사람(배우 윤여정)이 만들다 보니 한꺼번에 모든 음식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은 거의 다 먹어가는데 한 사람의 음식이 안 나온다거나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 4명의 친구들의 경우 한 명이 채식주의자였는데, 나머지 친구들의 음식이 모두 나와 한참을 먹는 동안 불고기에서 고기를 뺀 그녀의 채소 누들 볶음이 나오지 않았다. 편집을 통한 방송이다 보니 실제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없지만 3명이 음식을 모두 먹은 뒤에도 한참이 지나 그녀의 음식이 나왔다. 중간중간 배우 이서진은 미안하다며 정중히 사과했고 그녀는 괜찮다는 듯,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여기서 왜 내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던 걸까. 나는 음식이 늦게 나오면 불만을 남기는 건 물론이고 우리나라 음식점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품게 될 거란 생각으로 (거의 손님으로 빙의해서) 괜히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빨리 좀 만들지, 왜 이렇게 느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지만 당사자는 그저 조금 지루하고 살짝 배고픈 정도의 표정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친구가 남긴 채소를 맛깔난다는 듯 먹고 있었다.

일 년 전부터 기다려온 5월의 황금연휴가 시작된 지난 토요일. 나는 가족과 함께 강릉으로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날이었던 5월 1일은 호텔 근처에 있는 월정사에 들러 산책도 하고 그 앞에 있는 산채정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20분가량 기다리자 커다란 쟁반에 각종 나물이 담긴 종지 같은 접시들이 빼곡히 날라져 나왔고 식당 주인은 그 접시들을 하나 둘 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산채 정식 대부분이 그렇듯 정말 가짓수가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 함께한 형부는 상 위에 반찬 그릇이 다 놓이기도 전에 이미 젓가락을 들어 나물을 입에 넣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나는 그런 형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으로 잘 차려진 상 전체가 나오도록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때 조심스럽게 상 위에 접시를 올려놓던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찬이 아직 다 안 나왔어요. 조금만 천천히…, 기왕 찍으시는 거 다 나오게 찍으면 좋지 않을까요?”


내가 멋쩍을 걸 예상했는지 호호, 웃으며 말끝을 흐렸는데 살짝 민망해진 나는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 앉아 나머지 반찬이 다 올려지길 기다렸다. 우리는 유독 식당에서 성격이 급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음식엔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무려 20분 이상 음식이 나오지 않아도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것과 상 위에 접시들이 다 올려지기도 전에 음식을 먹거나 사진을 찍어대는 우리 사이에는 뛰어넘기 힘든 기다림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5월이 시작됨과 동시에 서둘러 더위가 찾아온 그날 오후. 정신없이 바쁜 도시도 아닌 곳에서 분식집에서 김밥 먹듯 산채정식을 먹으려던 내가 창피해져 평소보다 두 배는 느리게, 밥을 꼭꼭 씹어먹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섰다. 그런 다음 바로 앞에 있는 절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한쪽에선 시원한 커피를 팔고 한쪽에선 전통차를 팔았는데 우리 가족은 이번만큼은 여유 있게 전통차를 마시자고 의견을 통일했다. 


쌍화차, 오미자차 그리고 국화차를 주문한 다음 뜨거운 물을 마른 꽃잎이 담긴 유리 주전자에 부어 한참을 우리는 동안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주 앉은 엄마와 아주 오래전 떠났던 대관령 가족여행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언니와는 조카의 숨겨진 재능(체육대회에서 달리기 1등 한 것)에 대해, 남편과는 360도 회전하며 자는 아들의 잠버릇에 대해 이야길 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면 어쩔 수 없이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할 게 뻔했지만 아주 잠시 내 안에 숨겨 두었던 느림을 꺼내놓고 보니 우리 안에서도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은 여행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사랑 아재 개그, 브라보 아재 라이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