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쓰지 못한 카피를 씁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공원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간 일요일 오후. 같이 가자는 걸 쉬고 싶어!라고 대차게 말하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둘이 나가고 10분을 못 있고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이 적기다. 싱크대 선반을 비우자.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면 청소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 청소도 눈치껏 하게 된다. 청소나 빨래가 아닌 정리정돈은 더더욱. 호기심 왕성한 아이는 미지의 블랙홀 같은 수납장에서 새로운 물건이 끊임없이 나오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이건 뭐야? 어떨 때 쓰는 거야? 이름이 뭐야? 나 가지고 놀래. 계속 질문한다. 처음에는 나긋나긋 대답해 주다가 정수리까지 짜증이 쌓였을 땐 방에 들어가서 놀앗! 하고 소리친다. 그러니 달콤한 휴식을 버리고라도 애 없을 때 해치우는 게 낫다.
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온 지 5년 째다. 그 사이 한번 정도 부엌 선반 정리를 한 게 전부다. 요 며칠 주방에는 물건들이 흘러넘쳤다. 작은 무엇이라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다면 계속 올려놓았다. 이게 다 싱크대 수납 공간이 부족해서 더 이상은 넣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안에는 유통기한 지난 것 지금 쓰지 않는 것들이 90퍼센트다. 일단 속에 있는 것들을 죄다 꺼냈다. 봉지 봉지 뭐가 그렇게 많은지. 언제 먹겠다고 버리지 않고 신줏단지처럼 모셔두고 있었던 걸까. 하나씩 꺼낼 때마다 유통기한을 체크한다. 대부분 17년까지다. 서랍에서 쓰레기봉투를 꺼내 날짜 지난 것들을 가열차게 담는다. 쓰레기봉투에 붓다시피하다가 엉망진창으로 살림한 나 자신에게까지 욕지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비웠다. 쓰레기봉투가 5~6개쯤 나오고 안 쓰는 플라스틱 용기와 유리그릇을 버렸더니 싱크대 선반이 홀쭉해진 기분이다. 텅텅 빈 선반에는 밖에 나와 있는, 요즘 사용하는 물건들을 하나씩 넣었다. 올려놓을 곳이 있으면 더 쌓게만 되니까 싱크대 앞에 걸린 컵 선반도 떼 버렸다. 쓰는 건 몇 개 안 되는데 두 손으로 집어야 될 만큼 나와 있는 숟가락, 젓가락도 서랍에 넣었다. 벽은 국자와 프라이팬 뒤집기, 물병 닦는 솔만 걸어놓고 모든 걸 비워냈더니 어제 막 이사 온 신혼집 같다. 원래는 늘어놓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다. 그런 것들이 공간의 분위기를 더한다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스스로를 그렇게 위안하며 이건 멋이야, ‘늘어놓음의 멋’이라고 살았지만 그놈의 멋 열 번만 더 찾았다간 집안이 쑥대밭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움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더 바지런을 떨었다. 예전에는 락앤락을 씻으면 계속 식기 건조대에 쌓아 두었다. 다시 쓸 날이 올 때까지. 지금은 물기가 마르면 바로 뚜껑을 덮어 수납장에 넣는다. 숟가락 젓가락도 계속 쌓아두지 않고 마르면 서랍으로 직행. 컵도 마찬가지다. 건조된 컵은 바로 싱크대 선반에 넣는다. 그러면 식기 건조대도 심플해진다. 사사로운 정리들은 당장의 귀찮음을 뿌리쳐야 했다. 단정함의 힘은 세다. 나중에 하는 건 없다. 눈에 띄었을 때 해치워야 한다. 그래야 깨끗한 상태가 지속된다. 그냥 되는 건 없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누군가의 부지런함과 애씀을 필요로 했다.
<오늘로 쓴 카피>
비워진 상태를 유지하려면
당장의 귀찮음을 제거해야 하지.
정리정돈의 권력이 세질 때
집은 깨끗해지니까.
*소재: 청소 도구, 정리용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