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쓰지 못한 카피를 씁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글은 알다가도 모를 나를 쓰다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적는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퇴근 후 서울에 있는 한 호텔로 향했다. 남편과 형부 그리고 조카가 미국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여자들, 언니와 나는 호캉스를 보상처로 택했다. 5살 아들은 친정엄마 찬스. 아주 가끔 있는 이런 호사를 누리기 전 내가 가장 먼저 챙기는 건 책이다. 평소에 읽을 시간이 없다고 늘 투덜대고 있는 터라 육아하지 않는 이런 귀한 시간에 책을 읽지 않으면 무얼 한단 말인가!라고 늘 되뇐다. 퇴근길, 내 가방에는 30권 정도 다운로드한 전자책과 아사이 료의 에세이 <웃기고 앉아 씁니다>를 챙겼다. 이 정도면 절대 심심하지 않게 독서할 수 있지!라고 안심한 나는 호텔에 도착해 언니와 저녁을 먹으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웬걸 방에 돌아온 나는 전자책은 커녕 에세이조차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배 두들기며 깨끗한 침대에 널브러져 각종 SNS를 기웃거리다가 텔레비전을 켜서 <나 혼자 산다>와 <스페인 하숙>을 봤다. 그래, 이것만 보고 책 읽어야지 하고선 두 프로그램이 끝나자 계속해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예능과 드라마, 영화를 두리번거렸고 그마저도 끝났을 땐 내 스마트폰에 깔린 티빙 앱을 켜서 최근 정주행하고 있는 드라마 <눈이 부시게> 8화를 켰다. 새벽 3시가 넘어 눈이 침침해진 나는 그제야 불을 끄고 잠을 잤다. 호텔은 12시 체크아웃이지만 친정엄마가 12시에 점심 약속이 있다고 하셔서 일찌감치 호텔을 나섰다. 가방에 책들은 왜 챙긴 걸까?
주말 내내 남편이 없으니까 아이와 집에서 뒹굴거렸다. 평일보다 주말과 휴일에 낮잠을 길게 자는 아들 덕분에 자유시간은 넉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펼치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왜 책을 읽지 않는 거지? (나한테 하는 소리다) 맨날 책 읽을 시간 없다며, 책 좀 마음껏 읽었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시간이 차고 넘치는데 왜 쌓여 있는 책을 들춰보지조차 않는 거야? (나한테 하는 소리다) 이쯤 되니 다 핑계였나 싶다. 사실 나는 책 읽는 것보다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나 영화 보는 걸 더 좋아하고 책 읽는 것보다 SNS 순방하는 걸 더 재미있어하는지도. 그러면 취미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인터넷 쇼핑과 드라마 보기로.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느라 출퇴근 시간 지하철과 버스에서 책 읽는 게 전부예요,라고 떠들었던 건 그때밖에 독서할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라는 강제가 있어야 책을 읽는 나의 편협한 독서 패턴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책 읽을 시간 없다는 불만은 절대 못할 것 같다. 요 며칠 사이 나는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관찰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웃기시네. 이젠 시간 없다고 할 게 아니라 책 보다 인터넷 쇼핑이, 드라마가 SNS가 더 좋다고 말하고 다니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로 쓴 카피>
인터넷 쇼핑몰 순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드라마 정주행.
이런 것들이 책 읽는 것보다 좋습니다.
시간이 남을 때 진짜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럴싸한 것 사이의 간격,
좁히고 싶지만 넓으면 어때요.
인생, 다방면으로 폭넓을 때 더 재밌지 않을까요?
*소재: 취업 관련 포털 등 (다방면으로 폭넓다에서 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