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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03. 2019

작가라 불렀고 작가가 되었네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에디터 겸 카피라이터 업무를 한 지 9년 차가 됐다. 편집디자이너와 에디터 업무를 병행하던 시절과 합하면 11년은 될 테다. 전공도 전혀 다른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한 우물을 들입다 팠더니 여기까지 왔다. 에디터, 카피라이터 외에 나를 불러주는 또 하나의 호칭은 ‘작가’다. 여전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상체를 베베 꼬게 만드는 이 작가라는 말을 내게 처음 불러준 사람은 다름 아닌 직장 동료들이었다. 진지하게 보단 농담처럼 때로는 친근하게 가끔은 놀리듯이 그들은 나를 ‘작가님~’ 혹은 ‘이 작가’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손사래를 치며 “아유 참 무슨 작가예요! 농담 그만하세요.”라고 대꾸했지만 자꾸 듣는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이 불러주는 작가라는 호칭이 나를 들뜨게 했다. 책 한 권 쓴 적 없는 내가 정말 작가라도 된 것마냥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사물의 시선’이란 에세이를 본격적으로 연재할 당시 출판사로부터 첫 출간 제안 이메일이 왔고 거기에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이날의 기분에 대해선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메일을 여는 순간 의자에서 엉덩이가 3센티미터는 붕 뜨는 것 같았다. 눈 앞이 아찔해졌다. 당시의 나는 날마다 꿈꿨다. 내가 책을 낸다면, 정말 작가가 된다면 어떨까? 그런데 회사 밖에서 나를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식하여 출간을 제안해주었으니 어찌 머릿속에 새하얘지지 않을 수 있겠나. 


돌이켜 보니 짓궂게 나를 작가라고 불렀던 동료들이 있어 내가 정말 작가가 된 건 아닌가 싶다. 나를 불러주는 그 호칭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런 동료들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글 쓸 일이 있으면 더 잘하고 싶었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기 때문에 거기에 보답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정말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상대방을 불러줄 때가 있다. 결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 형부의 예가 그렇다. 오래전 들은 이 이야기는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내게 사돈어른인 형부의 어머니는 형부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혼내거나 다그치거나 꾸짖을 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이 부자가 될 놈아!”


아니 이렇게 유니크한 꾸중이 어디 있나? 정말 혼낼 때 그렇게 형부를 불렀다고요?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형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 한 번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 혼낼 때 “이 부자가 될 놈아, 엄마 말을 왜 이렇게 안 들어! 커서 부자 될래?”라고 혼냈다니, 그 상황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불렀단다. 그래서 형부가 부자가 되었느냐? 그렇다. 그는 부자가 되었다. 물론 부자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그래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산다. 참 신기하다. 부자가 될 놈이라고 불렀더니 정말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갈 건 아이에게 부자가 되라고 하라는 게 아니다. 이게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아이를 부를 때 함부로 부르진 말아야겠단 생각. ‘부자가 될 놈’이란 다소 노골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최대한 너는 중요하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불러주는 것, 의도치 않게 잘못해서 혼나야 할 일이 있을 때에도 그렇게 불러주면 사랑받는 아이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이를 혼내는 부모 (꼭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 어릴 적을 돌이켜 보면)는 아이에게 “이 멍청한 자식아” “바보 같은 놈!” “모자란 녀석”같은 표현을 쓴다. 책에도 자주 나온다. 뭐 물론 울화통이 치밀 때 이런 표현은 거의 뇌를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서 가능한 아이에게만은 이런 표현은 자제해주는 것이 어떨까. 혹여 내가 부르는 대로 아이가 그렇게 살게 된다고 가정하면 좀 덜컥한다. 


동료들이 나를 작가로 불러주었기에 난 작가처럼 행동하고 글도 더 잘 쓰고 싶었다. 얼마 전 읽은 엄지혜 기자의 <태도의 말들>이란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아이가 ‘행복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 모든 날이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적지 않은 순간이라도 행복하다는 걸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 말이다. 백 프로 공감했다.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걸 알고, 행복하다는 걸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 이름 외에 아이를 부를 때 ‘행복아’ ‘사랑아’ 같은 듣기 좋은 말로 자주 불러주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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