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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May 29. 2019

키우지 않고 함께 자란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오늘 아침 신도림역에서 김밥 한 줄을 샀다. 1500원짜리 소박한 김밥만 사 먹다가 오늘 처음 3000원짜리 치즈김밥을 샀는데, 밥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들어가 한 줄을 두 번에 나눠 먹었다. 출근한 직후 8시에 먹고 반은 좀 전에 먹었다. 점심은 패스다. 요즘 나는 말 그대로 우왕좌왕이다. 벌려 놓은 일(원고)은 많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헷갈리거나 대부분 하기가 싫다.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쌓이니까 더 하기 싫은 게 일. 이럴 때 나의 소심함은 꽤 효과적으로 능력 발휘를 한다. 즉 소심해서 욕먹는 걸 두려워하거나 거절 따위를 잘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낸다. 이번에도 나의 소심함에 기대 보련다. 일이 워낙 많다 보니 하루를 꽉꽉 채워서 일한다. 회사 일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서 쉴 틈이 없다. 사실 쉴 틈이 나면 나는 개인적인 원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놀아도 노는 게 아니지만 요즘은 정말 바빠서 원고 쓸 엄두도 잘 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요즘 안 하던 짓을 좀 하는데, 집에서 글을 쓴다. 좀처럼 없는 일이다. 육아와 살림 덕분에 원고는 언감생심 노트북 켜보지도 못할 때가 많지만 (사실 핑계일지도 모르지) 최근 아들이 태권도에 다닌 뒤부터 밥만 먹으면 곯아떨어지기에 아무것도 안 하기도 민망한 시간들이 좀 늘었다. 


아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요녀석하고 대화하는 재미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을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이해를 하고 본인 의사 표현을 명확히 하다 보니 대화가 되는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감사할 수 없다. 어린이집에서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는지 집에 오면 스케치북에 A, B, C, D 같은 알파벳을 하나씩 써 놓고 오늘 배운 거라며 보여준다. 아이가 조금 잘못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더라도 제대로 가르쳐주기보다 본인이 터득한 걸 자랑하게끔 둔다. 틀리게 알고 있다고 굳이 아이의 기를 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글자 하나 써놓고 자랑하는 것만 봐도 지금 얼마나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데, 굳이 자신감을 꺾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거 일일이 틀리다 맞다 고쳐주지 않아도 아이는 너무너무 잘 자라고 있다. 최근에 그걸 절실히 깨달은 일이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친정 엄마와 언니네 식구가 모여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남편, 형부, 언니가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운전 담당이라 콜라만 벌컥벌컥. 남편은 별다른 주사가 없다. 굳이 꼽자면 자는 거다. 그렇다고 뭐 길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고 그냥 집에 돌아와 기절하듯 잠든다. 그날도 1차 소주에 2차 맥주까지 거나하게 마시고 내가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미 조수석에서 잠들었고 아들은 초저녁에 잠을 좀 자서 잠들지 않고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편을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때 나는 그냥 깨우는 걸 포기하고 좀 더 자고 올라오도록 먼저 집에 들어간다. (시동을 다 꺼놓고 올라가기 때문에 보통 여름에는 더워서 올라오고 겨울엔 추워서 올라온다. 애써 깨울 필요가 없다) 그날도 아들에게 “아빠가 깊이 잠들었네. 우리 먼저 올라가자.”라고 말하고 아들과 차에서 내렸다. 이미 밤 12시가 넘어서 얼른 아이를 씻겨 침대에 누웠다. 늘 그렇듯 팔베개를 해주고 둘이 꼭 껴안은 채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품에 안겨 있던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 아빠가 걱정돼.”


설핏 잠들었던 나는 아이의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걱… 걱정?! 걱정이란 말을 쓰다니. 놀란 가슴 진정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럼 아빠 데리러 갈까?”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고 아이 손을 꼭 잡고선 주차장으로 갔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니 일어날 참이었는지 남편이 제법 빨리 깼다. “서하가 아빠가 걱정된데.” 남편은 “오구, 엄마보다 낫네~”하며 아들을 안아줬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남편이 씻는 사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아들은 다시 잠들었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깊이 잠든 듯했다. 


내 아이가 똑똑해서, 지독히 감성적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뭐랄까. 본능 같은 게 잠재돼 있다가 언어로 표현되는 단계인 것 같다. 다음 날 아들에게 ‘걱정’을 어디서 배웠냐 했더니(내가 가르쳐준 기억은 없어서) 어린이집에서 배웠단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다양한 얼굴 표정이 그려진 카드를 보며 슬프다, 기쁘다, 같은 기분을 배웠다며 내게 이야기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훌륭하다는 것의 기준도 잘 모르겠다. 아이는 그냥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나보다 커 보인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우린 함께 크고 있다. 아참, 그리고 다짐 하나를 했다. 아들 걱정시키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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