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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pr 26. 2019

난 내가 안쓰러울 뿐이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오늘 밤을 새워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 있는데, 이걸 쓰지 않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새 문서를 열었다. 그래 모든 상황이 그렇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겨버릴 수도 있는 일들이 살면서 얼마나 빈번이 일어나는가? 하지만 나는 쓰는 사람이라서, 써야 풀리는 사람이라서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서 이렇게 쓰고 이 아무렇지 않을 일을 넘겨보려 한다. 


발단은 오늘 아침 출근길. 나는 집에서 오전 7시가 조금 안 돼서 나온다. 우다다 뛰어 내려가면 2분 만에 도착하는 버스정류장에 7시에 도착하면 전철역까지 바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일주일에 3번 정도는 이 버스를 탈 수 있지만 1분만 늦어도 버스를 놓친다. 다행히 오늘처럼 시간 내 준비를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 종종 우리 빌라 2층에 사는 아저씨와 마주친다. 이 빌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5년이 넘었다. 


내가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갈 때 그 아저씨는 마을회관에서 집으로 걸어 올라간다. 잘은 모르지만 이른 아침 마을회관에 가서 문을 열어 놓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타이밍이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지 일주일에 세 번은 그를 마주친다. 보통은 그냥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고 빨리 지나치는데 가끔 친하게 굴고 싶은지 그 와중에 말을 건다. 젊은 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럼 그는 반갑게 고개로 인사하며 “애기는?”하고 묻는다. 휴… 저번에도 묻더니 또 묻네. 난 속으로 생각하면서 대답한다. 그가 묻는 ‘애기는?’ 질문의 요지가 뭔지 안다. 애기는 어쩌고 엄마가 일을 나가냐. 나는 빨리 정류장에 도착해야 돼서 그와 교차하며 “애기는 아빠가”라고 대답한다. 그의 다음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나는 얼른 가야 한다. 이 대화를 한 게 이번 주 월요일이었다. 


오늘 아침 다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저 아래서 2층 아저씨가 느린 걸음으로 올라오는 게 보인다. 아씨. 인사하기 싫다, 생각하면서 괜히 가방을 들여다보고 휴대폰도 보다가 그와 가까워질 때쯤 고개를 들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애기 아빠가 힘들겠다.” 이건 또 뭔 X소리. 아하 그러니까 엄마인 나는 아침 일찍 회사에 가고 아빠가 남아서 애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게 힘들겠단 소리? 이번엔 나도 가만있고 싶지 않아 “뭐가 힘들어요?”하고 그를 지나쳤다. 역시 그의 다음 대답은 들을 시간이 없다. 7시 버스를 타야 한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나머지 말은 이거다. “애 아빠는 지금 자고 있는데 뭐가 힘들어요?” 아 정말이지 이 아저씨의 아빠와 엄마를 나누는 발언들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부아가 치민다. 옛날에도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한 나에게 우리 애가 이른 나이에 어린이집에 보내지는 게 너무 불쌍하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이번에는 아빠가 엄마 대신 어린이집에 ‘등원’ 시켜주는 게 힘들겠다고? 자, 그렇다면 오전 6시에 일어나 일찍 출근하는 내가 퇴근 후 하는 일을 말해줄까? 퇴근하자마자 1, 2분을 다퉈 지하철에 오르고 어린이집에 도착해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아이 간식을 주고 그 사이 옷을 갈아 입고 저녁밥을 짓는다. 저녁을 먹이고 온몸으로 놀아주다가 씻겨서 재운다. (구구절절 말하기 싫어 초 간단으로 적었지만 이게 얼마나 나를 갈아넣어야 가능한 일인지 애를 키우는 부모들은 알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 아빠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편하게(?) 일찍 출근하는 대가가 이거다. 


물론 2층 아저씨가 이 모든 과정을 알 리 없다. 그러니 말을 그따위로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면 말을 말았으면 좋겠다. 무슨 근거로 아빠는 힘들고 엄마는 편하게 회사에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지? 힘들 아빠가 걱정되면 당사자한테 힘들겠수, 라고 말하던가. 그걸 굳이 엄마인 나에게 하는 이유는? 넌 참 편하겠다, 그거 아닌가? 정말 주먹 쥐고 부들부들이다. 


밖에 나가서 똑같이 월급 받고 일을 해도 살림과 육아는 엄마 몫인 걸로 당연시 되는 사회가 내가 사는 빌라다. 현실이다. 백날 책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밑줄 긋지 않아도 바로 오늘 아침 내 출근길에서 벌어진단 말이다. 이거 무슨 현장학습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게 살아온 아저씨를 바꾸고 싶은 마음도 일절 없다. 바뀔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글쟁이는 글로 풀뿐이다. 난 그저 애기 아빠가 힘들겠다, 라는 말에 뭐가 힘들어요?라고 발끈하여 대꾸한 내가 안쓰러울 뿐이다. 

(에효... 쓰니까 좀 내려가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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