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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l 23. 2019

혼자를 응원하는 방

29CM 컬처 에세이 연재 01 

평소 심심하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 없는 나는 혼자여도 행복한 사람. 오래전 누군가 말했다. 혼자일 때 행복한 사람이 결혼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으나 겪어보니 알겠다. 외롭다는 이유로 결혼하면 안 된다는 걸. 다행히도 나는 외로움을 몰랐다. 읽을거리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다. 결혼 후 한 집에 두 사람이 각자 좋아하는 작업을 하며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한 공간에 있지만 상대방이 뭘 하는지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이었다. 취향이 뚜렷한 우리에게 딱히 아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신혼이라 부를만한 4년이 흐른 뒤 나는 임신을 했고 이듬해 아이가 태어났다. 혼자이길 그 누구보다 바랐던 나에게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껌딱지가 생겼다. 후회나 원망이란 사치를 부려볼 틈도 없이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나는 혼자의 시간이 더 늦출 수 없을 만큼 절실하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애정 하는 소설가의 북토크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 봤자 엄마, 아내가 아닌 이유미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1박 2일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내내 설렜다. 숙소는 북토크를 주최하는 곳에서 마련한 장소로 전부터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플레이스 캠프 제주’였다. 사실 숙소의 분위기나 시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 짐은 중간 크기의 숄더백 하나에 들어갈 정도로 간소했다. 잘 때 입을 파자마와 속옷, 로션 스킨 정도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모두 숙소에서 제공된다고 했으니까. 제주 공항에 내려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갔는데 낯익은 얼굴이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오늘 참석하는 북토크의 주인공, 소설가 김애란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알지만 그녀는 나를 모르니 쉽게 아는 척할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와 나는 같은 버스에 탔다. 좋아하는 작가와 한 버스에 타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내릴 곳에 당도했다. 여전히 인사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10분 정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그 방은 말 그대로 혼자를 응원하는 방. 북토크를 듣는 것 외에 방에서는 아무것도 안 할 작정이기에 그 방은 나에게 환상적으로 심플했다. 가방에서 짐을 덜어내고 북토크 장소로 향했다. 행사가 끝나고 그녀에게 내 책을 수줍게 내밀었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날 밤 나는 가방에서 꺼낸 책을 펼치지도 않았다.


“아까 버스 정류장, 그분 맞으시죠? 남색 트렌치코트가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믿을 수 없었다. 나를 기억하다니. “이 책 이미 알고 있어요. 감사히 읽을게요.” 게다가 내 책을 알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아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방으로 갔다. 예정돼 있던 일정을 마치고 나니 살짝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나의 허기에 집중했던 게 얼마만인가. 늘 아이와 남편의 끼니를 챙긴 다음 내 차례였는데. 나는 배고픔을 허겁지겁 채우고 싶지 않았다.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가니 카페가 눈에 들어왔고 주저 없이 들어가 크루아상과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아이가 있을 때처럼, 쫓기듯 먹고 나갈 필요 없으니 늘어짐을 만끽했다. 재깍재깍 시간 가는 게 벌써부터 싫었다. 기분 좋은 출출함이 남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창 밖으로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깊은 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날 밤 나는 가방에서 꺼낸 책을 펼치지도 않았다. 침대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조금씩 들이치는 비를 맞았다. 혼자를 응원하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컬처 에세이는 29CM 컬처 캘린더에 매월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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