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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l 23. 2019

설명 없는 전시, 너의 해석이 맞아

29CM 컬처 에세이 연재 02 

10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디자인 에이전시로 이직을 했다. 고만고만한 작업만 계속하던 나는 (배가 불러서) 좀 지겹다는 이유로 더 힘든 곳에 가더라도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겠어! 하고 회사를 뛰쳐나온 것이다. 이 결정을 후회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곧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땅을 치며 회한했으니까. 나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편집디자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게 아니란 걸 깨달은 뒤였다. 전에는 이미지와 타이포 정도를 만져서 편집하는 디자인을 했다면 에이전시는 말 그대로 ‘프로 합성러’들의 집합소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회사에서 왜 날 뽑았는지 모르겠다. 당시 내 포트폴리오에는 합성 혹은 리터칭에 대한 작업물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출근 첫날 선배들이 하는 일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은행이나 백화점 같은 곳에서 보던 쌔끈한(?) 이미지를 만드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이미지를 이것저것 모아 말끔하고 티 안 나게 리터칭 하고 합성해 전에 없던 결과물을 탄생시키는 사람들. 에이전시에서 첫 임무가 주어졌을 때 나는 합격을 취소하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자칭 리터칭 전문가라 부르는 스웨덴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의 전시를 보고 왔다. 앞서 뜬금없이 나의 흑역사 이야기를 꺼낸 이유다. 초현실주의가인 에릭 요한슨은 프로 합성러의 대가라 할 만큼 어마어마한 포토샵 실력을 가졌다. 말 그대로 합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에릭 요한슨의 작업 스토리를 잘 알지 못하고 작품을 보면 마치 화가의 그림 같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합성이다. 작품 하나당 기본 레이어가 180개 이상이고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달씩 걸려서 합성을 한단다. 사실 에이전시에서 포토샵 합성 작업을 할 때 무엇보다 어려웠던 게 하나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시작하는 거였다. 즉 여기에 나무가 있고 저기에 집이 있고 이런 각도의 아이가 있어야 해. 하고 하나씩 모두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찾아 색감과 톤을 맞춰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시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스킬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에이전시에서 했던 작업과 에릭 요한슨의 작품이 사뭇 다른 이유는 그는 자신이 제작할 작품에 들어갈 이미지를 모두 직접 촬영한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나의 도구이며 컴퓨터는 나의 캔버스다’라고 말하는 그는 주변의 사물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단다. 더불어 “만약?”이라는 가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그래서일까?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난해하거나 낯설지 않고 은근히 친숙하다. 즉 우리도 한번쯤 상상해본 것을 결과물로 만들어냈다. 특히 전시 섹션 2에 ‘너만 몰랐던 비밀’은 4개의 섹션 중 가장 흥미롭게 봤는데 그 중 Cumulus & Thunder(2017) 작품은 우리가 보고 있는 구름은 실제로 누군가 양털을 잘라 하늘로 띄운 것이라는 상상이었다. 사실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만약'이라는 가상은 난해하거나 낯설지 않고 친숙하기만 하다 


포토샵 작업 원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이 전시를 보면 그 과정을 이해해서 흥미롭고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간중간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찍은 것들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에릭 요한슨은 1년에 8개 정도의 작품을 만들고 한 번에 하나씩 내놓는데, 대부분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한단다. 이 영상을 보면서 이것 또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에릭 요한슨의 전시에는 작품을 설명한 글이 없다. 이것에 대해 작가는 ‘별다른 해석이 필요 없다. 제목이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작품만 봐도 무슨 의도로 이걸 만들었는지 다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더불어 설명이 없는 대신 보는 이가 알아서 상상해주길 바란다고. 자신이 ‘만약 이러면 어떨까?’라는 상상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듯이 나머지는 알아서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열 명이 보면 열 가지 해석이 나오게 될 테니까. 에릭 요한슨의 작품은 결코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다. 오히려 다정하다. 보는 내내 미소 짓게 된다. 우리가 한 번쯤 해봤을 상상을 결과물로 만들어준 게 고맙게 느껴진다. 


*컬처 에세이는 29CM 컬처 캘린더에 매월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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