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는 여자의 오늘 사는 이야기
오전 6시, 잠이 좀 덜 깬 상태로 막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자리에 앉아 한숨 짧게 쉬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아직 자고 있는 남편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피곤하겠지만 서하 샤워 좀 해주고 싱크대 위에 빵 사다 놨으니 우유랑 먹이거나 냉장고에 요플레 중에 먹고 싶다는 거 줘. 빵 봉투 안에 자기가 먹을 빵도 있어. 잘 다녀와♥’
잊지 않고 매일 아침 버스에서 남편에게 문자를 보낸다. 전에는 포스트잇에 적어 창문이나 냉장고 혹은 남편이 일어나서 가장 먼저 찾을 법한 전자담배 옆에 붙여 놓곤 했다. 한데 남편이 미처 내 메모를 발견하지 못하는 날이 종종 발생했고 나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빠트리지 않고 확인하냐 물으니 카톡 메시지로 보내란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휴대폰을 들고 화장실로 가니 확인을 안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 또한 메시지 옆에 숫자 1이 없어지면 남편이 확인했다는 것이니 속이 후련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니 아이 등원 준비시키는 건 남편 몫이다. (나는 하원 담당) 전날 저녁에 씻겨 재우면 좋으련만 아이가 씻는 걸 워낙 싫어해 미룬다는 핑계가 아침에 아빠랑 씻겠다는 거다. 내가 해주면 샤워도 이래저래 지체가 되는데 남편은 후다닥 씻기니 그도 그냥 자신이 할 테니 무리하지 말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텐데 늘 노파심에 찌든 나는 이것저것 챙기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른 시간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자주 듣게 되는 통화 내용이 있다. 덜 자는 사람이 더 자는 사람에게 하는 조근조근 남기는 당부다.
“식탁 위에 밥 차려 놨어. 찌게 데워서 꼭 먹고 가.”
“냉장고에 샌드위치 있어. 우유랑 꺼내 먹어.”
“서랍장 제일 위 칸에 파란색 티셔츠 있어. 그거랑 아래 칸에 베이지색 바지 입혀서 보내.”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틀에 한번 꼴로 이런 통화 내용을 듣는다. 덜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은 더 자는 사람을 걱정하고 그들이 먹을 음식까지 챙겨 놓고 나온다. 내가 직접 해보니 내 한 몸 준비하고 나오는 것도 버겁던데 그들은 밥까지 해놓고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부지런한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하는 게 마치 숙명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눈에 보이는 데 어떻게 안 해?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라는 체념들. 그들이라고 더 자고 싶지 않을까? 꽤 부리고 싶지 않을까? 늑장 부리고 싶지 않을까? 더 자는 사람이 일을 더 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내 남편이 나보다 늦게 출근은 하지만 자주 야근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 힘든 일상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다만 물리적으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게 버거운 나로선 새벽에 일어나 남은 식구들이 먹을 밥까지 해 놓고 나오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게 여겨지고 한편으론 무감각해질 만큼 당연시된 그들의 일상에 측은한 마음마저 생긴다.
그런 통화 내용 중 가장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는 건 출근하는 엄마가 자녀와 통화할 때다. 그들은 때로 알람 기능까지 도맡는다.
“OO아 일어났어? 지금은 일어나야 해. 얼른 씻고 학교 가야지? 더 자면 지각이야. 식탁 위에 차려 놓은 거 꼭 먹고 가. 어제처럼 그냥 가면 안 돼.”
얼마나 곁에서 챙겨주고 싶을까? 졸음이 가득한 아이의 대답에 전화를 끊고 다시 잠들까 봐 노심초사하는 게 옆에 서있는 내게까지 전해진다. 학교 다니는 아이뿐만 아니라 더 어린 자식에게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오늘도 재미있게 놀다 와. 알았지? 이따가 엄마가 일찍 데리러 갈게.”
아이가 없을 땐 귀에 꽂히지도 않았을 말들이 워킹맘의 입장이 되니 한마디 한마디 뇌리에 박히듯 또렷하게 들린다. 밤새 열이 펄펄 끓어 아픈 아이를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출근하는 엄마 마음이, 전화를 끊고도 멍하니 전화기를 내려다보는 엄마를 보면서 도저히 남일처럼 여겨지지 않아 어깨라도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간 지하철에 올라탄다. 더 빨리 퇴근 해 더 많이 돌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