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지르셔야죠! 담주부터 장마라는데 우천 시 대비 안 해요?"
오전 10시, 멀쩡한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소나기가 시원하게 퍼부었다. 아침에 잊지 않고 챙겼던 가방 속 3단 우산이 타이밍이 맞지 않아 쓰진 못했지만 나름의 준비성에 괜히 뿌듯했다. 이 상태로 쭉 저녁까지 소나기가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에디터 새로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그럴걸? 내 기억으로도 오늘인데. 10시 30분 출근인가?
혹시나 해서 팀장의 자리를 쓰윽 돌아보니 팀장의 회전의자 곁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저기 저 사람 아니야?
혜진은 고개를 쑥 빼고 팀장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여기 잠깐 주목해 주세요. 오늘부터 새로 입사한 주민하 에디터. 저긴 엠디팀 여긴 디자인팀이고 저기 창가자리 끝자리가 백수진 에디터 겸 카피라이터 자리고 그 옆이 민하 씨 자리예요.”
주민하는 양손을 앞으로 가볍게 잡고 있어 차분한 인상을 주었다. 선이 제법 굵은 얼굴에 하얀 피부가 차가운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근데 첫 출근 맞지? 왜 가방이 없어?
팀장이 주민하를 소개하는 중에도 혜진과 나는 연신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러게? 아, 회의실에 두고 온 거 아닐까? 자리를 모르니까 임시로 거기에 두고 왔을 듯.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게도 회사에 일이 좀 많아져서 백수진 에디터랑 업무를 나눠서 할 에디터가 새로 왔으니 엠디, 디자이너, 마케팅 팀도 으쌰으쌰 해보자고. 우리 주대리도 앞으로 잘 부탁해요!”
팀장은 주민하를 내 옆 빈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의자를 살짝 돌려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백수진이에요.”
주민하는 나의 첫 팀원이나 다름없었다. 약간의 경쟁의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직장에서 유일하다고 여겨지는 업무를 맡아하는 건 힘들긴 해도 짜릿함이 있었다.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대체불가능한 업무. 이런 타이틀에 보람을 느끼며 6년을 일했다. 하지만 업무양이 한계를 넘어섰고 작업의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고객들이 우리 브랜드에 기대하는 기대치를 위해서라도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고 팀장에게 제안한 게 두 달 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살짝 경계를 보이면서도 반갑게 인사하는 내게 주민하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그때 인사팀 직원이 주민하가 앞으로 사용할 노트북을 가져와 책상 위에 내려놨다. 이제 회의실에서 가방을 가져오려나? 싶었는데 주민하는 그대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갈색 리넨 재킷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체크하나 싶더니 노트북 옆에 나란히 두었다가 이내 재킷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앞사람과 파티션은 있어도 옆자리와 파티션은 없는 구조라 빈틈이 없을 정도로 수십 권의 책과 사무용품들로 빼곡한 내 책상과 적막한 바다에 섬처럼 노트북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주민하의 책상이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곧이어 회사 어드민 주소를 알려주며 오늘은 기획전과 이벤트만 모아놓은 폴더에 들어가 파일을 열어보며 업무 파악을 하라는 팀장의 지시에 주민하는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간 보는 타입인가? 첫날이라 그렇겠지. 내일은 가방도 자기 소지품도 챙겨 오겠지. 가방 없이 출근할 리 없지. 하다못해 회사 생활하는데 노트와 펜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곧은 자세로 앉아 노트북 마우스 패드에 올린 오른손 손가락만 딸깍딸깍 움직이며 어드민을 체크하는 주민하를 힐끗거리며 가방 없는 주민하에 대한 알 수 없는 경계심과 거리감을 느꼈다. 난 마우스 없인 불편하던데, 터치패드로 잘 쓰네. 스누피 캐릭터 마우스와 그래픽 마우스 패드를 내려다보다 아무것도 없음의 주민하에 대한 추측을 떨쳐내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단순히 출근 첫날이라 분위기 파악 상 가방을 안 가져왔을 거라 추측했던(이것도 나로선 납득이 안 되지만) 나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간혹 입사하고 둘째 날부터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에 처음부터 회사에 자기 짐을 갖다 놓지 않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민하는 첫날부터 쭉 가방 없이 출근했다. 가방만 없는 게 아니라 책상 위에는 노트북 하나가 전부였다. 탁상달력, 다이어리, 연필꽂이, 기분 전환을 위한 작은 화분, 전자파를 막아줄 선인장, 종이컵 사용을 줄이기 위한 텀블러와 머그컵, 칫솔 세트, 탁상 거울, 포스트잇, 국어사전... 회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 모든 게 주민하의 책상엔 단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노트북뿐이었다. 그런 주민하를 보며 세상에 미련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저런 모습을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도 맥시멀리스트를 자처하는 나는 그런 주민하를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라 여겨 선뜻 가까이 지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주민하를 낯설고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주민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회사에서 하루 한 개 이상의 개인 택배를 받는 나는 언제부턴가 주민하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연말이면 회사 송년회에서 재미 삼아 전 직원 중 최고로 많이 결제한 사람을 뽑아 상을 주는데 3등 밖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나였다. 매년 이 결과를 보고 일등 한 직원의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나도 두 차례 일등한 경험이 있다. 쓸데없는 자부심이 생겼다. 온라인 쇼핑몰 직원에게 회사는 어쩌면 개미지옥이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힘을 가졌달까? 월급 받으면 회사에 다시 입금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부분의 직원이 매출에 각자의 스타일로 충성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일 ‘일 때문에’ 보고 있는 화면이 쇼핑몰 화면이니 어찌 핫템, 잇템에 무관심일 수 있을까?
다른 업계 직원이라면 쇼핑몰 화면을 보는 게 눈치 보일 테지만 우린 여기가 일터다. 더군다나 매달 직원에게는 직원 할인 15% 쿠폰이 3장씩 제공된다. 퇴사가 아니고서야 이 늪에서 빠져나오긴 힘들었다. 쇼핑몰에 다닌 경험이 없는 직원은 입사 후 신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패션에는 전혀 관심 없을 것 같던 그들의 스타일이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쇼핑을 응원하고 부추기는 회사 분위기는 낯설면서도 매력적이었다.
“백 수진 씨! 백 수진 씨!”
기다리고 기다렸던 택배 기사님이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엉덩이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의자에서 바로 튕겨져 기사님이 서성이시는 사무실 입구를 향해 달렸다.
“또 뭐 샀어?”
내 택배가 네 택배인 것처럼 뭘 샀는지 궁금해하는 직원들의 한결같은 마음. 품에 아기 안 듯 택배 상자를 들고 내 자리로 걷는 동안 혜진과 엠디 한 명 디자이너 두 명이 날 따라붙었다.
“와! 대리님 이 레인부츠 사셨어요?! 난 고민하다가 못 샀는데!”
“고민을 왜 하십니까 자매님. 일단 지르셔야죠. 담 주부터 장마시작이라는 데 미리미리 ‘우천 시’ 대비해야지?”
의자를 살짝 옆으로 치운 다음 새로 산 레인부츠를 박스에서 꺼내 한 발 한 발 신중히 부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날 둘러싸 새 레인부츠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구매를 칭찬하는 박수와 같았다. 때로는 이렇게 먼저 물건을 구입한 직원의 택배를 함께 뜯어보고 실물을 본 뒤 본인도 구매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아, 물론 그 반대도 있었다. ‘안 사길 잘했다’ 생각하며 위시리스트에서 지우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온라인 쇼핑몰의 최대 고객은 그 회사 직원이었다.
떠들썩한 나의 레인부츠 언박싱을 구경한 동료들이 자기 자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사이 주민하는 역시나 옆 자리 의 그 호들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 택배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유일한 사람. 괜한 심술에 하늘색 레인부츠를 주민하와 나 사이 책상 서랍 앞에 놓았다. 주민하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세워져 있는 걸까? 아니면 주민하도 속으로는 신상 레인부츠가 궁금해 미칠 지경일까.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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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또 올 게 있었나? 뭐가 남았더라? 상품명이 코드번호로 돼 있어 어떤 제품인지 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1시간 뒤면 받아 볼 수 있지만 굳이 사이트 주문 배송 조회 메뉴에 들어가 체크를 했다.
‘체크무늬 원피스!’
나는 소리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3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