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없이 출근하는 미니멀리스트가 입사하다니!"
-나 미니멀리스트 처음 봐.
-미니멀리스트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호들갑은.
주 대리 입사 후 혜진은 걸핏하면 미니멀리스트로 보이는 주민하를 대단하게 생각했다. 미니멀리스트와 정 반대 지점에 있는 맥시멀리스트를 자처하는 나는 그런 현상을 보고 괜한 반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때 나도 주체할 수 없는 물건에 치여 발 디딜 틈도 없는 집안 꼴을 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책을 찾아 읽은 적이 있었다. 살 빼기 전에 다이어트 책부터 찾아 읽고 화장을 잘하기 위해 유튜브보다 메이크업 책부터 읽는 나는 당연히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전 관련 도서를 읽어봤다.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에세이에서 알게 된 흥미로운 점은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마음을 먹는 순간 맥시멀리스트에 대한 반감부터 생긴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미니멀리즘을 접하고 하나둘 집에 있는 물건을 버리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맥시멀리스트보다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였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물건을 갖는 것보다 갖고 싶은 것을 참고 사는 게 더 힘들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법정 스님이 괜히 무소유란 책을 쓰셨겠나. 스님 정도 돼야 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우니까 그렇겠지. 나 또한 그 어려운 걸 해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생긴 대로 살자, 하고 돌아왔다. 쉽지 않은 그 길을 가고 있는 주민하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를 우러러보게 될까 봐 정신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맥시멀리스트가 미니멀리스트가 된 경우는 더러 있지만 미니멀리스트가 맥시멀리스트가 된 케이스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가 됐다가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맥시멀리스트가 된 (나 같은) 사정은 있겠지만.
사람이 물건을 미친 듯이 사보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애고 싶을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걸까? 그렇게 따지면 주민하는 원래 저랬을까 아니면 맥시멀리스트에서 가방 없이 출근할 수 있을 만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걸까? 그마저 아니면 소유, 무소유 이딴 거 상관없이 단지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안 갖고 다니는 걸까. 나는 조금 더 주민하와 친해지면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열고 싶어도 주민하 쪽에서 단답형으로만 대답하는 지금은 왜 가방 없이 회사에 다니는지 자연스럽게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근데 미니멀리스트는 점심 먹고 양치질도 생략하냐? 위생도 미니멀인가?
감추기 힘든 미니멀리스트에 대한 꼬인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평소 궁금했던 걸 혜진에게 말했다.
-뭔 소리야 아예 점심을 안 먹더만.
그러고 보니 출근 첫날도 긴장한 탓인지 속이 안 좋다며 함께 점심 먹기를 거부했던 주민하는 그 이후로도 계속 점심을 먹지 않았다. 칫솔을 갖다 놓기 싫어서 양치질을 안 하고 양치질을 안 해야 하니까 점심을 안 먹는 걸까?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살이 빠지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모르는 건가? 그러고 보니 무소유를 자처하는 사람치고 살찐 사람을 못 본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던 그때 커피를 핑계 삼아 혜진에게 탕비실로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진짜 이상하지 않아? 어쩜 저렇게 사람이 초 심플이야? 옷도 서너 벌 갖고 돌려 입는 것 같아. 미니멀리스트들은 옷장에 옷이 계절별로 한두 가지밖에 없다던데. 물욕이 기본 옵션인 우리 회사에 가방도 없이 출근하는 미니멀리스트가 입사하다니!”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 아니야? 아니 어떻게 출근할 때 휴대폰 하나 딸랑 들고 와? 아무리 폰으로 다 되는 시대라지만. 가방 없으면 좀 불안하지 않나?”
텀블러에 얼음을 담고 에스프레소 머신 버튼을 누른 혜진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지. 익숙해지면 오히려 되게 되게 홀가분할 거 같은데? 너나 난 절대 그렇게 못하겠지만. 그나저나 일은 어때? 앞으로 잘 맞을 것 같아?”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말을 거의 안 해. 바로 옆자리인데도 슬랙으로만 물어보고. 거기대고 내가 그냥 말로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특이하다 진짜. 보통은 본인이 좀 나서서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나? 예전에 사람한테 큰 상처받은 적 있는 거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혜진의 손에 들린 텀블러에 시선이 갔다. 이번에 스벅에서 새로 출시된 여름 바캉스 버전 텀블러였다. 오전 근무 시간 내내 마시고도 남을 만큼의 양이 들어갈 정도로 빅사이즈였다. 빅사이즈 텀블러가 없는 것도 아님에도 갖고 싶어지는 디자인이었다.
“그거 구나! 이번에 새로 나왔다는 거. 완전 예뻐. 얼마야?”
“나 이거 선물 받았잖앙. 민철이가 사줬어. 딱히 갖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사 온 거 있지.”
“네가 참 말 안 했겠다. 어떻게든 흘렸겠지.”
혜진의 새로운 텀블러 얘기가 한창 무르익을 즘 주민하가 탕비실로 들어왔다. 우리를 힐끗 보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주민하는 선반에 쌓아둔 종이컵 하나를 꺼내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섰다.
“커피 드시게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주민하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뺏어 든 혜진이 이어 말했다. 혜진의 손길엔 미니멀리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웬만하면 머그컵이나 텀블러 하나 두고 쓰세요. 설거지는 좀 귀찮지만 환경을 위해서라도... 헷”
종이컵만큼이나 많은 텀블러를 책상 한쪽에 쌓아 놓은 자신이 환경 운운하는 게 민망한지 혜진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혜진과 나는 종이컵을 쓰는 것과 컵을 씻느라 세제를 쓰는 것 중 어느 게 더 환경을 오염시키는지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다. 결론에 도달하진 못했다) 그러면서 지하 스튜디오 창고에 가보면 업체에서 촬영용 샘플로 준 머그컵이 아주 많다고 원하면 새것으로 하나 갖다 주겠다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게 편해요.”
주민하는 혜진이 건넨 커피를 받아 들고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지금 주민하의 책상에는 노트북과 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또 하나의 섬처럼 떠 있을 것 같았다.
<4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