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쓰는 글
얼음 냉온 정수기에 처음 이상이 생긴 건 지난여름이었다. 이사를 한 후 한 차례 정기점검이 있었고 스스로 세척하는 기능이 돌아간 뒤부터 얼음이 나오지 않았다. 얼음 입구에 컵을 밀어 넣고 버튼을 계속 눌러봤지만 띵띵띵, 하는 소리만 날 뿐 얼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음이 안 나오네?”
남편은 콜라를 마시기 위해 빈 유리잔에 얼음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백일을 갓 넘긴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준 뒤 방에서 나오는데 컵을 들고 정수기 앞에서 멀뚱멀뚱 나를 보는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은 일단 얼음을 포기하고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컵에 따랐다.
“왜 그런 거야?”
육아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정수기에 얼음 안 나오는 것까지 나에게 묻는 남편이 짜증스러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물어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일 테니 싸움밖에 되지 않을 게 뻔해 묵묵부답을 고수했다. 내 대답을 포기했는지 남편은 콜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수기는 또 왜 저럴까?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집이다. 생각 없는 직장 동료들은 육아휴직 동안 푹 쉬다 오라고 말하지만 회사 가서 책상에 앉아 모니터랑 씨름하는 게 백배는 편했다. 깊이 잠들 수 없는 건 기본이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해야 할 일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이 옷까지 늘어 세탁기는 하루 한 번씩 돌려야 했고 빨래를 개자마자 널어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 신혼 때부터 키우는 고양이 때문에 청소기 돌리는 걸 하루라도 미룰 수 없었다. 그런 거에 스트레스 받는 나를 보며 남편은 위로랍시고 좀 포기하고 살아도 괜찮지 않냐고 말했다. 그런 위로의 말보다 알아서 청소기를 돌려주고 쓰레기를 버려주는 건 어떨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팠다. 정수기에 얼음이 안 나와도 A/S 신청은 내가 해야 했다. 남편은 나오지 않는 얼음을 이상하게 여길뿐 해결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의문은 재빠른 단념으로 끝난다. 나는 정수기 옆에 붙은 관리 카드에 적힌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A/S 신청을 했다. 이가 시릴 정도의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 졌다. 얼음은 꼭 필요할 때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런 거예요?”
나는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정수기를 수리하는 기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제빙 센서가 문제인 거 같은데요. 일단 새 걸로 갈았으니 이젠 잘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 뒤로 알아서 세척하는 기능이 켜질 때마다 얼음은 나오지 않았고 이번에는 냉수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A/S 신청을 했다. 같은 기사가 왔다. 기사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이 세 번째였다. 정수기를 뜯어 놓고 뭔가를 만지는 것 같지만 매번 해결되지 않는 정수기 문제에 갑자기 화가 난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매달 렌털비는 빠져나가는데 물을 쓰지 못하는 날은 한 달에 반이 넘는 것 같아요. 이런 건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 거죠?”
기사는 진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죄송합니다.”
“아니면 새 제품으로 바꿔 주시던가요. 저희 집에 아기 있는 거 보이시죠? 매일 분유를 타 먹여야 하는데, 정수기가 매번 이렇게 말썽이니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몰라요.”
나는 괜히 기사에게 화를 냈다. 기사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일단 서비스 기록이 남아야 하니까 고장이 날 때마다 꼭 접수는 해주시고요, 그러면 그 이력이 남아 정수기를 공장으로…”
“공장이요? 그럼 그동안 물은 어쩌고요? 그리고 우리 제품을 가져가서 다른 중고품이랑 바꿔올지도 모르는데”
“고객님 그럴 리는 없어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좀처럼 좋은 낯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기사와 내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자 아이는 더 징징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뒤 자리를 옮겨 거실 소파에 앉았다. 기사도 살짝 짜증이 난 눈치였다. 생각 같아선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고 싶겠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 없다. 일단 오늘 수리는 마쳤다는 듯 가방을 정리한 그가 그만 가보겠다며 허리를 반쯤 구부린 채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갔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은 채 안녕히 가시라고 퉁명스럽게 인사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