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쓰는 글
한동안 잠잠하던 정수기가 또 말썽을 부린 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이 정수기의 꼭지 세 개는 사이좋게 돌아가면서 말썽이었다. 새벽 5시. 자다 말고 갑자기 울부짖는 아이는 배가 고프다는 징조였다. 옆에서 자던 나는 아이를 안아 조금 달래 주다가 다시 눕혀 놓고 주방으로 가 젖병 소독기에서 젖병을 꺼내 분유 네 스푼을 담았다. 정수기에 젖병을 대고 뜨거운 물을 받으려는데 띵띵띵, 소리만 날 뿐 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아이를 때리기라도 한 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아이가 울어대는 대도 남편은 깨지 않았다. 속으로 대단하다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다시 온수 버튼을 눌러봤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정수기를 탕탕 쳤다. 주전자를 꺼내 물을 올리고 물이 끓는 동안 아이 방으로 가 아이를 안아 달래 주었다. 아이는 젖병을 입에 물어주기 전까진 계속 울 태세였다. 물이 끓었는지 칙칙 김새는 소리가 나고 나는 뜨거운 물을 살짝 부어 분유를 녹인 후 정수를 받아 물을 젖병의 160ml 눈금까지 채웠다. 아이를 안아 분유를 먹이며 속으로는 정수기와 남편을 번갈아 가며 욕했다. 그 와중에 잠은 쏟아지듯 밀려왔다.
기사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일단 본사에 들어가 내용을 전달한 후 전화드리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정수기의 필요함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달에 한 번이지만 주말마다 찾아오는 정기점검도 매번 귀찮았다. 주말엔 좀 늘어지게 자고 싶은데 이른 아침에 찾아와 벨을 눌렀다. 고장이 날 때마다 찾아오는 A/S 기사의 방문은 그가 신고 있는 냄새나는 양말만큼이나 짜증 나고 불편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고객님, 본사와 이야길 나눴는데요. 서비스받은 이력이 많아 제품에 대한 위약금 없이 해지하실 수 있는 조건이 되고, 또 하나는 저희 제품 중 다른 새 제품으로 교환을 받으실 수 있는데 어떠세요?”
“위약금 없이 해지라는 건 그냥 정수기를 가져가신 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순간 정수기 없는 삶을 떠올려봤다. 하도 잦은 고장 탓에 주전자에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아 놓는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생수를 몇 병 사다가 냉장고에 쟁여 놓으니 시원한 물도 걱정 없었다.
‘그냥 이렇게 살아 볼까?’
결혼을 하고 가전제품을 하나 둘 장만하면서 정수기는 빠질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원할 때 시원한 물과 더운물이 나오고 나중엔 얼음까지 나오는 걸로 바꿀 수 있었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나는 조금 불편해도 이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저 기사님, 저희 그럼 그냥 해지할게요.”
“네? 없애시겠다고요?”
“네.”
“있다가 없으면 꽤 불편하실 텐데요.”
‘그럼 제때 제대로 고쳐주던가요’
“그냥 없이 지내볼게요. 그럼 정수기는 언제 가져가실 거죠?”
정수기를 없앤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생기는 공간에 왠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집에는 매번 필요해서 샀지만 없어도 상관없는 가전제품이 더러 있었다. 구매한 뒤 다섯 번 정도 썼을까 싶은 아토케어 침구 청소기는 옷 방구석에 처박혀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쓰고 있었고 다림질 좀 편하게 해보겠다고 구매한 스팀다리미는 매번 물을 채우고 비우는 게 번거로워 세 번 정도 쓰고 말았다. 딱히 망가진 게 아니라 버릴 수도 없는 것들. 난 그것들을 쓰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내주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다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수기는 주말에 와서 수거해 가겠다고 했다. 정수기를 없애면 다달이 나갔던 렌털비와 관리비가 절약되었다. 그것도 합치면 5만 원가량이었다. 물론 그만큼 물을 사야겠지만 관리를 받을 때마다 찾아오는 코디의 번거로운 방문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정수기를 없애기로 했다고 말했다.
“불편하지 않겠어?”
“좀 지내보다가 불편해지면 그때 다른 회사 제품을 렌털 하지 뭐. “
남편은 좋을 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정수기를 렌털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물건 하나 없애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생각을 마친 뒤 커피라도 한 잔 타려고 일어서는데 아이가 낮잠에서 깼는지 엄마를 찾았다. 습관처럼 젖병에 분유를 넣고 정수기에 들이댔다.
‘아참, 물 안 나오지.’
나는 이 불편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괜한 오기가 생겼다. 보온병에 담아 놓은 물을 젖병에 부었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