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쓰는 글
6개월의 육아휴직 기간을 마치고 돌아온 회사는 조금 낯설었다. 그사이 동네를 옮겨 새 건물로 이사한 탓도 있지만 스무 명 남짓한 직원들이 새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중에 그가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부서 팀장이 짬을 내 새로운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두 손을 가볍게 가슴 앞으로 모으고(태국 같은 나라에서 인사하는 방식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분명 처음 본 사람인데 얼굴이 너무 낯익었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아닌데 전체적인 느낌이 너무 비슷했다. 이렇게도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는 아주 잠깐 나와 눈을 마주쳤지만 곧장 하던 일로 돌아가려 책상에 앉았다.
그가 있는 곳과 내가 있는 곳은 건물 지하와 지상 7층으로 하는 업무도 부딪힐 일이 거의 없어 만날 일이 없었다. 아주 가끔 점심시간 사람들이 건물 앞에서 조금 우왕좌왕할 때 마주쳐 가볍게 목례를 하는 정도였다. 나는 친한 동료에게 그의 나이를 물어봤다. 그 일리가 없는데 나이를 확인하는 내가 조금 웃겼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다. 문득 언제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은 걸까, 새삼 징그러웠다.
육아휴직을 보내고 왔지만 다시 적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사에 있는 동안만큼은 아이를 낳기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어느덧 두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아이 때문에 자주 술자리를 가질 수 없지만 모처럼 팀끼리 조인해서 마시는 자리라 각별히 남편에게 허락을 받았다. 그날 내가 앉은 테이블에 그가 왔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간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고 평소와 달리 조금 기분이 업되 보이는 그가 자신의 잔을 들고 내 맞은편 자리에 와 앉았다.
-여기 앉아도 되죠?
-네 그러세요.
-많이 드셨어요?
-조금요.
그는 내 앞에 있는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러고는 자신의 잔을 들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글 쓰신다고요.
-네.
-일 말고 개인적으로 쓰는 글은 없으세요?
-바빠서 잘 못쓰고 있어요. 집에 가면 애 보기 바빠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잔을 채웠다. 몇 잔을 더 주고받다 보니 조금씩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회사와 집, 일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기... 내가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아서 처음에 좀 놀랐어요.
-……
-그게 누구냐면… 내 옛날 애인. 웃기죠?
-……
-근데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저 그 사람 알아요.
무슨 농담을 하는 거냐며 어이없단 투의 내가 맥주잔을 들었다.
그의 표정은 전과 달리 조금 굳어지는 듯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지환. 아니에요?
-어… 어떻게?
-형이에요. 우리 형.
-형? 그럼 날 알고 있었어요?
-처음엔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됐죠. 형은 지금 미국에 있어요.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거든요.
할 말을 잃은 나는 그토록 풀리진 않던 수수께끼를 어이없이 푼 것처럼 허탈해졌다.
-그랬구나. 그 사람 만나는 동안 동생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당신이 지환이 동생이라니… 하하…
그는 한참 동안 술잔만 기울이더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할 말을 잃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환이는 잘 지내요? 결혼했다면 아이는?
-아이는 아직 없어요.
-그럼 지환이한테 내 얘기했어요?
-이름이 뭐였는지 물어봤어요.
-날 기억하던가요?
-그럼요.
-……
혹시나 하고 바랬던 마음에 찬바람이 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어쩌다 그의 동생과 한 회사에서 일하게 된 걸까. 그와 나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이야기를 했다. 그의 형과 연애하던 시절에 대해. 그 시절의 그와 나에 대해서. 나는 비슷한 사람을 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마음은 조금 설렜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었지만 테이블 아래 자꾸만 스치는 그의 다리가 어떤 미래를 예지 하는 건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