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오후 4시에 쓰는 글

by 이유미


퇴근 길 수박을 한 통 샀다. 나에겐 올 여름 들어 첫 수박이었다. 아, 벌써 수박을 먹는 계절이구나, 싶은 생각에 괜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사계절 내내 파는 과일이지만 좀 더 선명해 보이는 것 같았다. 수박을 계산하고 수박을 균형있게 감싼 끈을 손에 끼웠을 때 오늘은 왠지 아내가 나를 받아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3개월 째 아내는 곁을 두지 않았다. 결혼 8년차 부부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그다지 힘든 줄도 몰랐다. 내가 들어가면 두 아이가 나를 반겨주고 아내는 평소보다 일찍 들어온 나를 해맑게 받아주며 내 손에 든 수박을 건네 받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좀 늦은 저녁을 먹고, 9시 뉴스를 좀 보다가 아내가 잘라온 수박을 먹으며 얼마 전 터진 안산 토막 살인 사건 용의자에 관한 뉴스를 통해 내심 우리 주변에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를 생각하며 검은 씨를 손바닥에 퉤, 하고 뱉을 것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와~하고 달려들 줄 알았던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집안은 정막 그 자체였다. 사위는 어두웠다. 집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거실 조명을 켜며 성호야, 하고 아들의 이름을 불러봤다. 대답이 없다. 혜미야, 하고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간 걸까? 나는 안방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봤다. 아무도 없었다. 바지춤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서서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곰곰이 생각했다. 휴대폰 다이어리를 열어 16일에 표시된 일정이 있는지 확인했다. 장모님의 생신이라거나, 처형의 생일이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이의 생일….? 그럴 리는 없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나는 수박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혹시나 싶어 식탁이나 냉장고에 메모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휴대폰이 없었다. 그제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다급히 뛰어서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어둑해진 단지 내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둘쭉날쭉이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신들의 둥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내와 아이들은 어딜 간 걸까? 그때 눈치 없는 내 배는 꼬르륵 처량한 소리를 냈다.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다. 일단은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아내가 저녁 식사를 만들어 놓고 나가진 않았을까, 생각하며 부엌으로 갔다. 먹다만 된장찌개 하나 없었다. 밥통도 텅 비어있었다. 나는 냄비를 꺼내 물을 끓였다. 신라면 하나를 싱크대 선반에서 꺼내 반을 갈랐다.


라면이 다 끓었을 즈음 김치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을 때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입이 벌어졌다. 수박을 넣을 공간이 없을 만큼 과일이 가득 찬 냉장고. 오렌지 포도, 사과, 멜론. 수박도 있었다. 과일가게라도 턴건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망연자실해졌다. 잘 익은 라면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허탈감에서 빠져 나와 일단 김치가 담긴 락앤락 통을 꺼내고 다 끓은 라면을 냄비 째 식탁 위에 놓고 허겁지겁 먹었다. 과일을 언제 저렇게 많이 산 거지? 분명 어제만해도, 아니 오늘 아침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낼 때만해도 과일은 없었는데. 나는 라면을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휴대폰으로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커졌다. 나는 현관으로 가서 아내의 신발을 살펴봤다. 어떤 신발이 없어진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구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무슨 일이 있어 나간 건 아니라는 건데… 나는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골똘히 생각했다. 이럴 게 아니라 처형한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처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애들 엄마 거기 안 갔습니까?”
“여기 온 댔어요?”


아… 처형도 모른다. 나는 알았다고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엔 장모님께 전활 걸었다.


“얘들하고 어딜 갔다고?”
“네. 혹시 어머니 댁에….”
“이 보게 나 여기 중국이야. 나 지난 월요일에 친구들하고 중국 온 거 모르나?”


그제야 장모님 칠순 기념으로 중국 여행 보내드린 게 생각났다.

나는 아, 네네 즐거운 여행되십시오, 하고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어딜 간 걸까? 갑자기 화가 났다. 다 늦은 저녁에 애들까지 데리고 어딜 가면 가장인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는 아내가 들어오면 따끔하게 한마디 하겠다고 다짐했다. 불현듯 상호와 혜미가 보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혜미가 잘 시간이 훌쩍 넘은 10시였다. 아내 친구의 전화번호를 갖고 있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어떻게 한 명도 모를 수 있지? 미리 좀 알아두는 건데. 나는 괜히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렸다.
그때였다. 띠띠띠띠,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헐레벌떡 뛰어갔다.

“자~ 신발 벗고 화장실로 직행! 손발 씻고…”
“여보!”


나는 거실 복도 한 가운데 서서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 당신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당신이야 말로 어딜 다녀오는 거야. 이 밤에. 전화는 왜 안받아?”
“나 휴대폰 놓고 갔어. 진동으로 해놔서 안 들렸나 보다. 혜미가 너무 안 자서 바람 좀 쐬러 나갔지.

근데 당신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9시 퇴근이 일찍일 리 없다. 언제부터 9시 퇴근이 일찍이 되었나. 아내는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게 당연해진 것이다. 일찍 온 내가 이상한 거였다.


“냉장고에 과일은 왜 그렇게 많아?”
왜 과일이 그렇게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아, 그거? 집 앞 과일 가게에서 아까 타임세일했어. 언니랑 나누려고 좀 샀지. 당신 저녁은 먹었어?”


별거 아니었다. 그 노무 타임세일.


“아빠~”
상호와 혜미가 나에게 와락 안겼다. 아이들 볼에서 초여름 저녁의 찬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볼을 비볐다.


“혜미가 잠이 줄었어. 통 안자. 저녁에 꼭 데리고 나가서 좀 걷다 와야 돼. 나도 살 빼고 좋지 뭐.”
“내일부터는 같이 가자. 저녁산책.”
“정말? 당신 일찍 올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웬 수박이야?”


아내가 식탁 위에 수박을 보고 말했다.


“시원해 보여서.”
“여름이다 그치? 여보 간만에 맥주 한잔 할까?”
“좋지.”


어쩌면 오늘 밤 곁을 내줄 것 같았던 내 짐작은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내는 냉장고에 있던 수박을 꺼내고 내가 사온 수박을 집어넣었다. 수박을 쩍, 하고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나는 두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욕실로 향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