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쓰는 글
평소에도 유난히 느린 엘리베이터는 13층에 멈춰있었다. 올라가는 방향의 세모 버튼을 누른 뒤 기다렸다. 아침부터 30도를 웃도는 기온 탓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출근하는 또 다른 동료를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건물 입구 쪽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났다. 누가 오고 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 누군가가 곁에 섰다. 고개를 들기 전 신발을 봤다 낯익은 구두. 검은색 스틸레토 힐이었다. 설마… 설마 하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내 예상은 맞았다. 김희원이었다. 얼마 전 거의 절교를 선언하고 말을 섞지 않은지 두 달 째였다.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얘를 마주친담.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그건 김희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나보다 한 발짝 정도 뒤로 물러선 상태였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느려 터진 엘리베이터. 9시 1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미 지각이다. 금요일이다. 퇴근 후 약속이 있어 오래간만에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뻐근했다. 어딘가 어색했지만 참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서고 뒤이어 김희원도 탔다. 문이 닫혔다. 나는 9층 버튼을 눌렀다. 그녀는 이번에도 한 발 뒤에 대각선 방향에 서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바뀌는 빨간 숫자를 하릴없이 보고 있을 때였다. 3층에서 4층으로 바뀔 때 덜컹,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조금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별일 아니겠지란 생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는 다시 움직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미동도 없이 엘리베이터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까지 꺼져버렸다. 완벽히 밀폐된 공간이라 눈앞이 깜깜했다. 내 손과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혼자 중얼거리던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열림 버튼을 눌러보았다.
“그걸 누르면 어떡해?” 김희원이 발끈하며 말했다.
“그러다 문이라도 열리면 어쩌려고?”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버튼 몇 개를 마구 눌렀다. 곧이어 종 모양의 비상벨을 찾아 눌렀고 부저 소리가 났지만 저쪽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이씨 뭐야 진짜. 고물 엘리베이터.”
김희원이 낮게 짜증을 냈다. 다시 비상벨을 눌렀다. 반응이 없다. 그때였다.
“거기 사람 있어요?” 익숙한 경비아저씨 목소리였다.
“네! 여기 사람 있어요.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 아저씨.”
“며칠 전부터 이상하더니 결국 멈췄네… 거 조금만 기다려봐요. 사람 불렀으니까 곧 올 거예요.”
“어, 언제까지 기다려요?” 김희원이 물었다.
“금방 올 겁니다~”
우리가 조마조마한 것과 달리 아저씨의 목소리는 태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듯한 잡음이 짧게 들리더니 소통이 끊어지고 정적이 흘렀다. 기다리라고 하니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어차피 지각이었는데, 잘됐네.”
체념한 듯 그녀가 말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대꾸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가 다시 큰 한숨을 몰아 쉬었다. 휴대폰을 보는데 엘리베이터 안이라 터지지 않았다.
“아으… 짜증나.”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가방에 툭 던졌다. 엘리베이터 안은 점점 더워졌고 가슴이 좀 답답한 건 기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붙어 다니던 짝꿍이었다. 말 그대로 단짝.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김희원이 자신이 직접 나에게 소개해준 지금의 내 남자친구 K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시작됐다.
남자친구가 없던 나에게 김희원은 소개팅 한번 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별생각 없던 나는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오케이 했고 그녀는 전 직장에 함께 있던 지금의 내 남자친구 K를 소개시켜줬다. 그는 디자이너고 김희원은 평소 내가 곰 같은 인상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던 터라 괜찮을 거라며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주선자인 김희원과 나 그리고 K가 주말 오후 홍대 현대백화점 앞에서 만나게 되었고 별다른 기대 없이 나와서인지 나쁘지 않았던 K가 마음에 들어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우리 둘은 딱 일주일 뒤부터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사귀기로 했다는 나의 말에 김희원은 적잖이 당황하는 듯했고, 어느 순간부터 나 모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K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 안 좋은 이야기라는 게 그가 게임을 많이 한다는 것, 잠이 많다는 것, 등등 매우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느 날 김희원이 같이 점심을 먹는 H에게 이런 이야기를 흘렸고 나를 잘 따르던 H가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다시 전달함으로써 그녀와 나는 절교 아닌 절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척이나 그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문제점의 기준이 달랐던 그와 나는 그런 뒤에도 잘 만나고 있었다.
“K랑은 잘 만나?”
“어. 잘 있어. 네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잘 지낸단 말이지.”
“내가 언제 너희가 헤어지길 바랬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왜 K에 대해 그런 험담을 하고 다닌 건데?”
“무슨 험담, 난 그저 K의 단점에 대해 네가 알았으면 했던 거지.”
“그게 결국 이간질이었던 거고.”
김희원이 신경질적으로 손 부채질을 하는 듯 펄럭이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