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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13. 2016

아무것도 필요 없는 너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나는 틸란드시아야. 흔히 공기 난이라고 불리는 이국적인 희귀식물이지. 야생란보다 더 거칠고 분방하면서도 우아해 보이는 내겐 뿌리가 없어. 돌들 위에 착생해 공기 중의 수분과 먼지 속 미립자들을 먹고 살아가지. 난 지금 내가 본의 아니게 공기 정화 식물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야. 
<윤효 ‘그의 세컨드 라이프’를 읽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지도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아이 낳기 전 부랴부랴 집을 옮기느라 만삭에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그때 대부분 남편 혼자 이삿짐 정리를 했는데 생각 같아선 배만 안 부르면 밤을 새워서라도 짐 정리를 끝내고 싶었다. 전에 살던 집은 오래된 주택 2층이었는데 고즈넉하고 빈티지한 누바 벽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좀 어두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어 이사하기 전 하얀색 페인트로 칠을 했다. 화사하면서 북유럽풍 분위기도 나는 게 우리 부부의 취향에도 맞고 평수도 적당해 여건만 허락하면 오래 살고 싶었다, 덜컥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계획한 임신이 아니어서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건 남편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둘이 살기엔 불편함이 없지만 아이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었다. 우리는 출산 한 두 달을 남겨놓고 이사를 결정하고 부랴부랴 집을 알아봤다. 도심에서 조금 들어갔지만 산이 가까이 있어 공기가 상쾌하고 신축건물이라 깨끗했다.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됐을 때 남편과 나는 양재 꽃시장에 갔다. 기존에 키 큰 화분은 있어서 아기자기한 선인장과 다육이 식물을 사고 싶었다. 그중 틸란드시아는 그 당시 내가 말 그대로 ‘꽂힌’ 식물이었다. 왜 그 식물이 그렇게 사고 싶었을까? 꽃처럼 화려하고 예쁜 것도 아닌데. 한창 북유럽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금속 프레임에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 위에 작은 트레이, 그 위에 쉬크하게 툭 던져진 것처럼 놓인 모습이 인상적이었을까.


illust by 곽명주


    틸란드시아는 한 개에 4, 5천 원이었다. 생각보단 비쌌다. 얘는 화분도 필요 없다. 흙도 물도. 공기 중에 먼지를 먹고 산다고 했다. 그러니 그냥 아무 데나 올려놓으면 되는 거다. 뭐 이런 식물이 다 있나 싶지만 뾰족뾰족한 자태가 그리 볼품없지도 않다. 그래, 개성 있었다. 나는 이 틸란드시아를 2개 샀다. 평소 쓸 일이 없었지만 꽤 우아한 아이스크림 컵을 꺼내 그 안에 담아 하나는 화장대 위에, 하나는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는 걸까? 계속 의심스러워하며.


    며칠 뒤 시어머니께서 오셨다. 집이 어느 정도 정리돼 여기저기 구경하신 후 거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실 때였다. 과일을 좀 내오겠다고 부엌으로 간 나는 잠시 뒤 사과가 든 쟁반을 들고 자리에 왔는데 뭔가 어색해진 것 같아 테이블 위를 둘러보니 틸란드시아가 옆에 있는 다육 식물 화분에 올라가 있었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며 나는 틸란드시아를 집어 다시 원래대로 옮겨놨는데 그걸 본 시어머니가 왜 흙도 없는 곳에 식물을 두냐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정신없어 화분에 물도 못 주고 식물을 말라죽게 하는가 싶어 조용히 옆 화분으로 틸란드시아를 옮겨 놓으신 것.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거참 신기한 식물도 다 보겠다며 신기해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삭의 며느리가 몸이 무거워 화분에 물도 못 주고 흙도 없이 식물을 말라 죽이는가 싶어 조용히(그것도 내가 자리를 뜬 사이 몰래) 식물을 옮겨 놓으신 어머니가 좀 귀여웠다.

    계속 의심스러웠던 틸란드시아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흙과 물도 없이 잘 있다. 크기는 그대로이니 자라진 않는 것 같다. 그저 현상유지하고 있나 보다.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는 틸란드시아야말로 나 같은 귀차니즘들에게 최고의 반려식물이 아닐까. 얼마 전 SNS를 통해 ‘마리모’라는 식물을 알게 됐는데, 물속에 넣어 키우는 이끼같이 생긴 이 생명체(?)는 기분이 좋으면 물 위로 뜬단다. 틸란드시아보단 관리가 좀 까다로울 것 같지만 기분이 좋으면 뜬다는 말에 호기심 발동. 다음엔 마리모에 도전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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